한국일보

[칼럼] ‘원한·복수’는 불행의 악순환

2004-07-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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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국에서 30대의 엽기적 살인범이 체포되어 떠들썩하다. 범인은 지난 10개월간 19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본인은 26명이나 죽였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는 주로 출장마사지 여성과 부유층 노인이라고 한다. 범인이 출장마사지 여성과 결혼했다가 이혼 당했고, 또 다른 출장마사지 여성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출장마사지사를 증오했
던 까닭이다. 또 자신이 어린 시절에 불우했고 전과자 신세가 된 것은 부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범인은 “내가 불행한 건 이들 탓”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범인의 경우 뿐 아니라 과거에도 큰 사건이 났을 때마다 범인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사회나 남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하여 남과 사회에 원한을 갖고 복수심에 불타서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악명 높은 사건으로 1994년에 발생했던 지존파 사건과 1996년에 발생했던 막가파 사건의 범인들도 자신들의 불행이 사회적 모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부유층을 상대로 살인행각을 벌였다고 했다.

막가파 사건의 범인들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싶었다”면서 외제차를 탄 사람만 납치하여 생매장을 하는 등 잔인한 범행을 했다.원한과 분노로 인한 복수심은 이런 범인들의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조선역사에서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든 것은 자신의 생모가 폐위되어 사사된 사실을 안 때문이다. 왕이 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복수심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수많은 관련자들을 살륙하여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했다.

이처럼 원한으로 인한 복수심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런 원한이 집단화 할 때는 더욱 무서운 결과로 나타난다. 6.25 때 사람이 많이 죽고 더 불행했던 일은 전쟁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 보다 원한과 증오심으로 서로 무참하게 살륙했던 일이다. 북에서 내려와 남한을 점령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반공인사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죽였다.

공산치하로 세상이 바뀌자 어제까지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주인을 잡아 복수를 했다. 그 후 남한이 다시 북진하자 이번에는 북한측에 부역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 죽였다. 이 바람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정변이나 혁명이 난 후에 벌어지는 숙청도 과거의 원한에 따
른 복수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의 현 정부여당의 개혁작업인 과거청산 프로그램이 날이 갈수록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보수정치의 타파에서 시작하여 언론, 검찰 등 힘있는 세력을 계속 건드리더니 군 물갈이론이 나오고 있고 친일문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과거에 “아니다”였던 것이 “이다”이며 과거에 “이다”였던 것이 “아니다”가 되었다.
이렇게 정 반대로 되는 변혁의 저변에는 엄청난 힘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현 정부와 여당의 중심세력은 과거 재야 운동권 출신이다. 그들은 한국의 지난 날 주류사회에서 소외되었고 온갖 핍박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 사회적으로 그들의 과거는 불행했고 또 남들의 눈에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설움과 원한이 없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일단 권력을 잡았을 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고통을 받아온 과거가 온통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잘못된 것을 고치겠다는 것은 당연한 욕구이다. 그러나 그것 뿐일까. 자신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복수심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혁명 후 숙청이라
는 것이 그런 것이기에 이런 기우가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한으로 인한 복수는 다시 원한과 복수가 되풀이되는 악순환일 뿐이라는 것이다. 살인범의 원한복수이든 폭군의 원한복수이든 혁명의 숙청이든 결국 가해지는 또다른 보복을 받게되는 것이 인생사의 진리이다. 내가 받은 고통과 내가 가진 원한은 나에게서 끝내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로 새 출발 하는 것이 진정한 승자의 길이다. 탄탄한 개혁을 제대로 해보자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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