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모든 것이 내 탓이요

2004-07-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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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얘기를 들어보면 한인사회에는 온전치 못한 가정들이 예상외로 많아 보인다. 자식이 문제 아니면 부부 쌍방간에 문제로 불화가 심하고 건강은 건강대로 상해 상당수 가정이 문제가 적지 않은 것으로 비쳐진다. 겉으로는 경제적으로 많이 안정돼 있지만 내부를 보면 많은 가정이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런 대로 문제없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그 차이는 가정의 근원인 나 스스로가 준비된 사람으로서 얼마만큼 가정을 위해 살면서 내공을 쌓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가정의 모든 잘못들은 다 준비되지 못한 가정의 주춧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부모나 부부가 제대로 씨를 뿌리지 아니하고 가꾸기를 게을리한 경우 그 결과는 자연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그리
고 결국 나에게 죄 값(?)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바로 업보라는 것이 아닐까.


자식이 잘못되고 가정이 잘못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원리를 깨닫지 못한데서 나온 것으로 결국 이웃, 주변사람들에게까지 독이 되어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한인가정에서는 주로 경제적인 문제에만 신경을 기울이지 보다 더 중요한 이런 원리나 근본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저 돈만 벌어 좋은 집사고 좋은 차 타고 다니며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 돈만 대주면 다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에게서 문제가 생기고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원인이 다른 데 있지 않고 바로 나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안되고, 저런 이유에서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다 나의 탓이다. 그런데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가정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 당장은 문제가 없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쌓여 곪아터지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바쁜 삶과 고달픈 생활을 이유로 문제를 방관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변화하지 않을 경우 문제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뼈저린 자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픔을 견뎌내는 진통이 없고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다. 노력 없이 공짜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털도 안 뽑고 고기를 먹으려고 하는 심보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내공을 들이지 않은 사람은 마음의 평정과 가정의 안녕,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마약에 손을 대고 갱단에 가입해도 부모들은 아이의 탓만 하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일어난 일인지 모르고 있다.

나이가 60이 되어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오히려 책임이나 문제의 원인을 아이에게로 전가한다. 이런 사람은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 해서도 자식과 말다툼을 하거나 부인과, 아니면 남편과 여전히 싸움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들을 그대로 묵과하거나 지나치게 되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사람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인데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옷 잘 입고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음이 가난할진대 모두가 헛것이다. 말하자면 집안은 멍들어 가는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데만 급급할 것인가.

결국 결과는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내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가정의 주춧돌인 나 스스로가 씨를 제대로 뿌리지 못하고 가꾸기를 올바로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없는 나무는 흔들리게 되어 있다. 근심,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성공이다. 스스로의 방관과 무지가 가정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자만이 성공적인 가정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러려면 우선 석고 대죄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내 안의 벽을 깨부셔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
음이라면 안될 일이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늦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바로 가장 빠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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