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커피 한 잔

2004-07-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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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시기는 100년 전쯤이다.1890년경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가 권한 커피를 즐겨 마셨고 이어 일본인들이 서양식 다방을 개점하면서 커피문화가 시작됐다. 본격적으로는 1970년대에 국내 커피메이커가 설립되면서 전파되었다.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듬뿍 탄, 70년대 대학가의 명물인 다방커피를 기억하는 한인들이 많을 것이다. 또 달걀 노른자 한알을 띄운 모닝커피도. 지금이라면 고콜레스테롤 음료라고 절대 마시지 않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일반 커피보다 가격이 비쌌다.


각종 다양한 커피 전문점이 성시를 이룬 한국에 살다가 막 미국에 왔다면 엷게 뽑아서 컵에 가득 따라 마시는 아메리칸 커피는 싱거워서 못마실 것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고기를 잔뜩 먹었을 때,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 ‘커피 한 잔’으로 그것이 또 입맛에 맞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커피 이야기를 왜 이리 지루하게 했냐하면 요즘 서류미비자들, 다르게 표현하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적발되어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이민국에 체포되는 등 신분 때문에 곤욕 당하는 한인들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온 지 얼마 안된 1990년 초반 신문사 식당에서 커피를 따라 마시는데 설탕은 넣지 않고 프림만 한 스푼 넣고 마시니 옆에 서있던 동료가 “영주권자시구만. 나는 학생으로 와서 아직 아무것도 없어서”하더니 설탕과 프림을 잔뜩 넣어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다른 동료가 와서 블랙으로 커피를 마시자 “이쪽은 시민권자시네.”했다.
크림이나 설탕 중 한가지만 넣으면 영주권자 커피, 크림과 설탕을 모두 넣으면 불법체류자 커피라는 이 말은 커피 마시는 습관으로 미국 온지 얼마 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당시 미국사회에 유행되는 유머였다.

그런데 이 유머가 얼마 있다가 사라진 이유가 시민권자들도 칼슘 보충을 위해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또 불법체류자들도 시민권자인척 하느라 블랙으로 마시기 시작하면서였다고 한다.

커피 취향으로 신분을 구별할 정도로 신분 문제는 어제나 지금이나 이민의 핫 이슈인 것이다. 미국에 불법체류자들이 700만~1,300만명 정도이고 이 중 한인들도 만만치 않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체류 신분 때문에 제대로 된 병원 치료를 못받고 숨진 문철선씨 유가족을 돕고자 본보에 성금을 기탁하는 독자들에게서 동병상련(同病相憐) 심정을 보았다.


‘뉴욕주내 이민자들은 체류신분이나 의료비 납부 능력과 상관없이 미국 시민과 동등한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다’, ‘대학입학시에도 일정조건만 충족시키면 소셜넘버 없이도 거주자와 같은 조건으로 장학금이나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다’고 옆에서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내 손에 그린 카드가 쥐어있지 않으면 선뜻 병원이나 학교 문턱을 넘기 어렵다.

사실, 신분 문제는‘저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 왔지’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금기 부문 아닌가. 우리는 이웃과 정을 나눌 때 먼저 그 사람의 신분을 묻고 사귀지 않으며 사랑을 시작할 때 그래 너는 시민권자? 영주권자? 불법체류자니? 묻고 시작하지 않는다. 미리 묻고 시작했다면 그 사랑은 오래 가지 않으며 우정은 거짓이 될 것이다.

남들이 하기 싫은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하는 사람 중에는 한국의 IMF 이후 파산한 가정경제를 일궈보겠다고 밀입국한 가장도 있고 외롭고 힘들게 살며 한국의 노모를 부양하거나 자녀 학비를 대고 있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서류미비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으면 누구나 자신이 이민국장이라면 영주권을 주고싶을 것이다.

건설현장, 야채 창고, 정원이나 쓰레기 처리장 등에서 일하는 많은 서류미비자들도 엄연히 하나의 사회 구성원이다.이는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섣부른 동정심이 아니며, 그저 좀더 폭넓게 동서고금을 통틀어 하나의 사회와 국가의 인적 요소로서 합법이민자도 있고 불법체류자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11월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로부터 장기간 체류해온 서류미비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광범위한 합법 프로그램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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