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만식 선생같은 지도자가 그립다

2004-07-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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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정순(대뉴욕지구 원로성직자회 부회장)

1945년 8.15해방 후 수많은 애국지사와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또는 국내에서 조국 재건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도 기억나는 인사 중에 북에서는 조만식 선생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은 해방 전에는 조국의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평북 오산고보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우리 국산품 장려를 솔선수범하기 위해 무명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해방 직후 조선민주당 당수로 있을 때도 무명 두루마기를 입었다.해방 직후 선생은 이북5도연합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김일성이었다.


조선민주당 창설 당시에는 선생은 당수로 추대되었고 이윤영 목사와 최용건이 부당수가 되었다. 후에 최용건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어 김일성과 야합하였다. 선생은 필자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동년 10월 조선민주당 황주군 당부를 결성한 당일 선생이 보내준 전용차에 승차하려던 순간 체포되었다. 수감되는 현장을 목격한 중앙당 간부가 즉시 평양 중앙당에 돌아가 당수에게 보고하자 선생은 지체없이 소련
군 최고사령관, 스티코프 대장에게 항의했다.

그로 인해 필자는 수감되어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 있던 중 7일만에 석방되어 죽시 평양 중앙당에서 보내준 선생의 전용 차로 선생이 묵고있는 평양 대동강변 호텔(일명 고려호텔이라고도 함) 2층에서 선생을 뵈었다.
석방 전날 소련군무화 장교는 감방에 들어와 ‘공산당을 반대하다가 들어온 자가 저 사람인가?’하고 묻더니 간수가 ‘그렇소’ 하고 대답하자 ‘당장 목을 잘라’ 하고 자기 손을 자기 목에 갖다 대면서 ‘참수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다음날 필자는 최고사령관 특명으로 석방되었는데 선생은 필자를 석방시키고 몇달 안 가서 모스크바 3상회의 반대 주장과 공산당과 타협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필자가 중앙당에 도착한 2일 후 이북5도장 및 군당위원장 연석회의 석상에서 선생은 자기 옆좌석에 필자를 참석케 하고는 “황주군당을 조직하고 고문당한 라동지의 말을 들어봅시다” 하고 필자의 등을 가리킨다.

붕대를 풀어나가다가 피가 굳어서 붕대가 떨어지지 않자 간호원을 불러 물을 상처에 적셔 낚아채자 선혈이 쏟아지는 장면을 본 당 간부들은 고함을 지르며 “저런 희생을 보고도 당수께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이오. 공산당과 싸울 결단을 내리세요” 하고 윽박지른다.잠시동안 눈을 지긋이 감고 침묵하던 선생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할 것입니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폐회”를 선언한다.

24세의 혈기왕성하던 필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선생 침실 옆방에서 몇일을 유숙하던 필자는 중앙당 간부 일행과 같이 해주의 황해도 당 결
성식에 참가한 다음날 중앙당 간부 일행은 곧바로 남하하였다. 조만식 선생만이 당 사수를 목적으로 평양에 남았다가 종래 처형 당하고 만 것이다.

무저항주의자 인도의 간디와 같이 선생은 동양의 간디라고 칭할만한 애국자요, 북한의 지도자였다. 선생은 민주당 당수이면서 시골 일계 군당을 조직했다고 해서 24세의 시골 청년 당원을 평양에까지 초대한 겸손한 지도자요, 공산당을 반대하다가 구속된 필자를 ‘석방하라’고 최고사령관에게 대들었던 지도자이기도 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중앙당 간부가 월남하면 자신도 따라 월남할 것 같은데 끝내 혼자 남아 희생당한 것이 참으로 안되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6자 북핵회담을 앞에 두고 남한에서는 수도 이전이니 정치 개혁이니, 친일파 처벌을 위한 법 개정이니 하는 따위로 국론이 분열되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시점에 조만식 선생과 같은 참된 지도자요, 애국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마음 든든할까 하는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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