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함 받는 날

2004-07-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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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지난 주말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시 보에르네에서 열린 결혼식에 다녀왔다.
신랑 매니는 한인 2세, 신부 줄리의 부계는 이태리, 모계는 아이리쉬인 미국인이었다. 그 둘은 엠허스트 대학 선후배로 신부가 블랙벨트 3단 태권도 교관으로 8년 반을 연애한 터였다.

워싱턴D.C. 출신 신랑은 텍사스 토박이 신부를 따라 직장을 텍사스 대학병원으로 얻어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참이었다. 행사의 하일라이트는 결혼식 전날 함 받는 날이었다.


거대한 목장이 리버 락 카페로 변한 곳에서 타주 및 현지 하객들을 위한 리허설 디너가 있은 직후 깜깜한 밤길을 헤치고 “함, 사세요. 함, 사세요.”외치는 한국말이 참으로 생소하면서도 반갑게 들렸다. 식사를 끝낸 하객들은 다들 밖으로 뛰쳐나갔다.

청사초롱을 든 두 명의 길잡이를 따라 함을 진 신랑의 절친한 친구는 오징어를 한 마리 손에 쥐고(냄새 때문에 함 팔 때만 얼굴에 댐) 블루진과 청남방 차림의 신부아버지와 상대하여 함을 팔러 온 것이다.

그전에 함 파는 날 풍습을 설명하며 신랑 아버지가 “신랑 친구들 잘 다룰 자신있냐?”고 묻자 “’자신있다”고 말해 “어떻게 할거냐”고 했더니 “말 안들으면 한방 먹이면 된다”고 하여 폭소를 자아냈던 신부 아버지. 이날 연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신부와 함께 함진 애비를 맞았다.

그런데 누런 무명끈으로 튼튼하게 맨 함을 진 함진애비와 곁꾼들은 만만치가 않아 5불, 10불, 20불짜리를 넣어 십여개의 하얀 봉투를 준비했던 신부 아버지는 술을 따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집으로 끌어들이려 안간힘, 나중에는 함 안받는다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신부의 두 오빠가 뒤에서 함을 밀어 함 팔러온 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매니’
패밀리와 ‘줄리’패밀리의 밀고 당김이 팽팽했다.

텍사스 토박이 농민들과 백인, 히스패닉, 한국과 타주에서 간 하객들이 에워싼 가운데 점차 혼례의 흥이 무르익어가며 목장 길 중간쯤에서 신부가 노래를 하고 “매니, 아이 러브 유”를 외치며 신랑에게 키스하자 함은 집 입구까지 걸어갔고 집앞에서 신부 아버지가 춤을 추며 “반짝 반짝 작은 별”을 노래하다가 “위 러브 유, 매니”하면서 신랑을 끌어안자 드디
어 함은 그 집 문지방을 들어섰다.

집에 들어선 신랑은 신부 아버지 앞에서 큰절을 하였다.알고보니 신부가 한국전통혼례를 제안했고 신부가족이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여 재미있고 무
리없이 진행하기 위해 함 받는 연습을 이틀이나 했다고 한다. 덩치 큰 텍사스 백인 남자가 동양계 신랑을 끌어안으며‘우리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을 때 사랑이란,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어야해, 인종차별이란 단어가 왜 있지 싶었다. 그냥 남과 녀, 신랑과 신부가 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인2세는 자신도 결혼시 한국전통 혼례를 올리고 싶다며 결혼상대로 인종은 상관없다고 한다. 이민 세대가 오래될수록 타인종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가 하버드대 등과 공동으로 전국의 타인종 부부나 동거자 5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에서 인종간 결혼과 교제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응도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다. 자녀가 인종이 다른 부모를 가짐으로써 불리하기보다는 오히려 유리한 게 많은 것으로 믿는 것으로 응답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한 번 뿐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의 중요한 일들을 흘리고, 놓치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지나고 보면 아쉬운 일들이 무수하다.물론 시간, 돈, 마음 모두 여유가 없어서 법원에 가서 증인 앞에 선서하고 싸인한 다음 후다닥 30분만에 치르는 결혼식도 이해되지만 좀더 여유가 있다면 고유문화를 보여주는 이런 이벤트성 결혼식도 썩 괜찮을 것 같다.

부모의 인종이 다른 혼혈 미국인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마당에 점차 인종차별이란 단어도 구태의연해질 것을 기대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미국이란 하나의 틀 속에서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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