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에디 하트(Eddie Hart)의 양모(養母)

2004-06-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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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커네티컷)

얼마 전 PBS에서 놀만디 상륙 60주년기념 특집 ‘Thank you Eddie Hart’라는 2차대전 후에 있었던 눈물겹고 감격스러운 일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했다.

1944년 6월 4일 불란서와 유럽 일대를 독일 점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놀만디에 상륙하면서 그 해변에서 하루에 전사한 미군이 무려 2,0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날을 D-데이 또는 Longest 데이라고 일컫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전자는 작전상 상륙일자를 기밀에 부친 것이오 후자는 상륙하는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여 사상자를 많이 냈다는 이유에서일 것으로 생각한다.

에디 하트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담배염초 농사를 하다가 군에 징집되어 유럽전쟁에서 제 83보병사단 329여단에서 복무하였으며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기 23일 전에 독일에서 전사하였다. 그 나이 23세였고 2차대전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은 유럽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일본 이오지마 상륙전을 포함하여 모두 46만여명이라고 한다.

오랜 독일군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유럽 일대는 미군을 환영하는 큰 축제를 이루었고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감사하여 독일을 비롯한 네덜란드 근방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들의 묘를 네덜란드에 유치하였던 것이다.

온국민은 정부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의 전몰장병을 양아들 또는 양딸로 맞이하여 그 무덤을 돌보면서 1년에 2번 내지 3번 묘를 방문하여 아름다운 꽃으로 그 유령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브랙켄(Vracken)여사의 가정이 양자한 전몰군인이 바로 에디 하트였으며 정성스럽게 그의 무덤을 보살펴 오던 그의 가족은 1957년 미국으로 이민오게 되었고 그의 오빠 요한 브랙켄이 대신 에디의 양부(養父)가 되어 그의 묘를 보살폈다고 한다.

미국 뉴욕으로 이민온 브랙켄 여사는 곧 에디의 가족을 수소문하여 에디의 누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후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자주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수년 전 에디의 누님은 처음으로 온가족이 네덜란드에 있는 동생의 묘를 방문하였으며 요한 브랙켄의 친절하고도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다큐멘터리가 눈물겨웠다.

1944년 8월 역사적인 파리의 해방은 수많은 미군과 영국군의 희생의 보람이었으며 오마하 해변가에도 전몰장병들의 묘가 있는 것이다. 20년 전 6월 4일 레이건대통령이 놀만디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오마하 비치 전몰장병의 묘를 방문하였고 금년에는 60주년을 기념하면서 부시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전몰장병의 유령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한국에도 부산 근교에 유엔 전몰장병의 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묘를 방문하여 고마운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들의 유령을 위문하고 있는지?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공산화되어 김정일 치하에서 우리 모두가 자유를 구속 당하면서 굶주리는 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불란서 역시 미군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나치화하여 히틀
러의 독재 아래 수많은 이들이 유대인들의 학살과 흡사항 처형을 받았을 것으로 안다.

네덜란드 국민들이 미국의 은혜를 보답하는 그 조그만 정성이 아름답고 비록 영을 달리 하였으나 그 유령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적인 ‘전몰장병의 양자/양녀’ 정책은 불란서와 한국사람들이 본받을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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