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살할 용기의 반만 가져도

2004-06-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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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리버티은행)

사흘이 멀다하고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명예 때문이건 생활고 때문이건 유일하며 존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각자의 이해타산으로 망자(亡者)들을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만 ‘죽을 용기의 절반만 갖고 명예회복을 꾀했거나 생활고를 타파했다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특히 나어린 자식들까지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정에 앞서 분노감 마저 느껴진다.


소위 ‘니힐리즘’이라는 허무주의가 회자되던 1800년 전후(前後)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할만한 선진국이어서 권태로부터의 돌파구로 자살을 택했는지 모르지만 이태백, 삼팔따라지, 사오정이 서울 장안에 득실거리는 한국과는 그 패턴이 다르다.

자식들까지 죽여가며 자살하는 것은 어떠한 구실로도 용서받을 수도, 합리화 될 수도 없다. 죽기를 기약하고 해서 안될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하물며 살인강도 노릇 하는 것도 아니고 처자식을 부양키 위해 피땀을 흘리는데 하늘의 도움이 없다면 그 때 가서 예수, 부처를 욕해도 늦지 않는다. 이럴 때면 반드시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필자의 친구 중에 방선생이 있고 방선생 친구 중에 이(李)사장으로 통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분은 초중등학교에 학습지 같은 것을 납품해서 크게 성공했고 점잖으신 교장선생님들, 수많은 학교 선생님 고객들로부터 깍듯이 사장님 대우 받아가며 호의호식으로 음풍월 했던 사람인데 자기 의사였는지 누구의 꼬임이었는지 경험이 전무한 출판사업을 크게 벌이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끼니는 간 곳 없고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빚을 지고 평시의 지인들로부터 몇 푼의 이사 지용의 구걸마저도 문전 박대를 받았으니 그 모진 인심에서 절망과 비탄, 자괴감이 어떠했을까, 상상이 어렵지 않다.

어제까지만 해도 큰 출판회사의 사장, 올망졸망한 4남매의 허기진 자식들을 도닥이는 풀기없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는 이 패가망덕한 사장이야말로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친구간에 금전거래는 돈 잃고 사람 잃는 법,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방선생께 몇 푼의 이사 비용을 얻은 이사장은 길가에 버려진 리어카를 줏어다가 손질하고
푼돈을 쪼개어 밑천삼아 인근 과수원, 채소밭, 생필품 공장 등을 전전하며 비바람, 눈보라치는 날엔 더더욱 열심히 뛰어 눈물어린 동정과 가장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다 보니 한 삼년 고생한 보람으로 서울 인근 모(某)시에 큰 서점을 차려 재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삼류 연속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꾸며낸 얘기와 아주 흡사하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내 잘못이건 남의 잘못이건 자기의 책임을 완성하는 것은 살신성인과 대등한 것이며, 특히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한국사회에선 지고(至高)의 선(善)이다.

이사 비용을 구걸할 때 흰눈 뜨고 쪽박 깨던 빚쟁이들을 한 사람 빠짐없이 빚을 갚으러 찾아다닌 것은 중앙정보부 간첩 잡기와 같았으니 이 소설같은 실화요, 실화 보다 더 소설같은 얘기를 듣고 필자의 글재주 없음을 한탄했다. 필자는 울고 이 얘기를 들었는데 이 졸문을 읽고 우는 독자는 없을터이니 말이다.

큰 돈을 갚으면 한 때 즐거움이지만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은 평생 못 잊는다(一飯竟致終身之感)는 말은 이사장이 방선생에게 은혜 갚는 행동을 옛날에 누가 미리 알고 써놓은 얘기 같다.

이사장은 지금 전국적으로 알려진 굴지의 중소기업 사장이다. 행여라도 자살의 유혹을 받는 이가 있다면 그 용기의 반의 반만 써도 이사장 만큼 재기에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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