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안방이 전쟁터

2004-06-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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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편집국 부국장>

한국민은 물론 수백만 해외동포들이 무사귀환을 염원했던 김선일씨 인질 사건은 이라크 과격 무장세력에 의한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 사건으로 ‘인간으로써 저렇게 잔인할 수가, 인간이니까 저렇게 잔인하겠지’ 하는 심정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은 아무리 포악한 성정을 지녔어도 한 방에 깨끗하게 끝내지 오랜시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는 피말리는 고문을 하다가 죽이지는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고 인질과 포로는 늘 있어왔다.인류의 탄생이 있었던 선사시대, 근대문화의 모태랄 수 있는 그리스 시대와 세계제국의 원대한 꿈을 이룬 로마시대, 그리고 지금의 유럽을 만든 중세, 급격히 발달된 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9.11이후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인류역사상 최고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 지구가 참여한 지구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아무리 먼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도 실시간으로 전 세계가 알고 만다.

우리는 11세기말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성전을 치른 제 1회 십자군 전쟁에서 필자 미상의 십자군이 ‘정복지마다 이슬람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처참한 학살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알고있다. 더불어 1455년부터 30년간 벌어진 장미전쟁이 중세유럽사 중 가장 잔인한 싸움인 것도. 장미라는 로맨틱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붉은 장미를 달고 싸운 영국 랭카스터가와 흰 장미를 달고 싸운 요크가의 싸움은 적이라고 판단되면 신분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전쟁터에서 일어난 것이고 전사가 아닌 다음에야 전해들은 이야기일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중동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은 인터넷의 발달로 TV앞에 모여앉은 전 지구인을 전쟁터로 데려가고 있다.

복면 쓴 남자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앞에 눈 가린 희생자가 불안에 떠는 모습과 절규가 안방 침실과 거실 테이블위로 찾아온다. 무장 테러 단체들은 인질의 신분을 막론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하여 비디오 촬영한 다음 인터넷에 올리고 처형 시한을 정해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참수하는 장면을 세계인의 눈앞으로 배달, 안방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전세계인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주고자 하는 그들과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을 바에야 아예 철저히 무시해 버리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여 전 지구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 사건 관련자 외에는 매스컴은 사실 보도 정도로 간단히 알리자. 모든 사람들은 ‘참수 운운’ 하는 엽기적 사이트로 들어가는 천박한 호기심도 버려야 할 것이다.

김선일씨 비극이 보도된 22일 미 CBS-TV와 뉴스 데이 취재진이 본 신문사를 방문, 한인사회 반응을 취재해가고 여기저기서 문의전화가 오는 등 편집국은 하루종일 뒤숭숭하고도 심란한 하루를 보내었다.

한인 매스컴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한인사회 발언을 듣고자 한 것인데 미주 이민 역사상 언제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미국 매스컴이 직접 찾아와 의견을 물었나 싶다.이번 사건으로 한국이 이라크전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한반도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우리들은 세계인들 눈앞에서 옷 벗은 느낌일 것이다.

이것이 좋은 일이라면 예를 들어 지난 2002년 월드컵이 4강에 그치지 않고 우승을 차지하여 전세계가 놀라게 하고 한인들이 기뻐 춤추게 할 뉴스였다면, 그래서 취재를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싶다. 그래서 원래 우리 민족은 손과 발이, 몸이 빠르다. 보아라 맨하탄 브로드웨이를 일군 한인이나 한인 청과상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고 장사를 시작하는 것을.
우리의 부지런한 몸놀림이 오늘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고 인터뷰한다면 오죽 신이 났을까.

이번 사건이 어찌나 끔찍한 지 주위에서 소소하게 일어난 불화와 섭섭함과 고통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며칠간 속 끓이던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저 사이좋게,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나의 평화, 가정의 평화, 인류의 평화, 세계의 평화지 자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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