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25 종군과 회상

2004-06-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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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뉴저지)

한국국민의 최대 비극이었던 6.25가 벌써 54주년을 맞게 되면서 지난 날의 일들이 점점 퇴색해 가는 이 때에 노대통령의 6.25참전유공자증서와 거기에 대한 공로의 보상금까지 보내주니 금년의 6.25는 유난히 종군시절을 다시 회상하게 된다.

불시의 남침으로 남단의 낙동강 유역까지 밀려 위급한 상황까지 처했을 때 미극동부 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해 서울을 탈환하고 다시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투 개입으로 부득이 후퇴하게 되었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남북한 모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을 것이다.


필자도 북한에서 평양의 모병소(숭실학교 강당)까지 끌려갔다가 불합격증을 위조하여 도망쳐 숨어있던 몸이라 그리운 부모님과 생이별하게 되었다. 12월 5일에 남포에서 피난선은 떠난 뒤고 미해군은 대동강을 따라 배라는 배는 다 폭파시켜 배가 없어 갈밭속에 숨겨놓은 작은 낚시배로 만원이라 사공이 노를 젓지도 못하여 간신히 흘러가는 강물따라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 해주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장수산 근방에서 인민군이 민간인으로 가장하고 피난대열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오보에 의해 미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아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다시 연안시내에 왔을 때는 시장 상인들이 운집한 곳에서 다시 유엔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았고 다시 임진강을 도강할 때는 승선료가 없다는 이유로 강 중간에 하선시켜주어 추운 날씨라 떠내려오는 얼음조각에 찍혀 종아리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온지 15일만에 서울에 도착하니 갈 곳이 없었고 국민방위군의 대열에 끼어 대구까지 남하하여 방위하사관 학교라는 칠성국민학교에는 마루바닥이라 담요가 없어 밤이면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어 남의 불침번을 도맡아 서주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고기 주는 사역이 있다고 하기에 자원했더니 시내의 어느 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미군의 시체를 포장하여 트럭에 적재하여 미국으로 후송하는 작업이었는데 처음에는 서먹서먹했다. 그러나 후에는 장작개비를 포개는 것처럼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간고기에 감자를 섞은 것을 한 주걱 얻어먹었다.

이것이 몇 개월만에 고기맛을 처음 본 것이었다.이후 다시 지평이라는 곳으로 옮기는데 그곳의 뒷산에는 죽은 중공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해진 신발을 바꿔 신고는 다시 전진하여 춘천에 도착해 미군 최전방부대가 주둔했던 자리로 이동했다. 그들이 버리고 간 군복이며 군화를 내 다 해진 학생복과 바꿔 입고 중공군의 신발은 버리고 군화를 신고 두툼한 초콜렛 조각을 처음 맛보며 파괴된 소양강 다리 옆에 미공병대원들과 함께 부교 공사를 지원했다.

후에 금화지구의 최전방지역에서 위생병으로 개인천막을 지급받아 생활하는데 어느날 밤 늦게 긴급출동명령으로 대원을 실은 트럭이 소등한 채 앞산에서 비춰주는 조명불빛을 따라 금화시의 변전소를 지나 금성의 김일성 고지 근방에 새벽에 도착했다. 첫 마디의 주의사항이 철조망을 넘지 말고 각자 개인호를 팔 것을 지시했는데 아침 동이 트니 앞산에 유엔 전투기
가 폭격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밤 중공군의 직사포가 내 옆의 호에 떨어져 제일 친한 전우를 잃었다.

전방도로 복구사업을 계속했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워낙 심해 1주일만에 이곳에서 후퇴, 지금의 포천에서 연천으로 돌아가는 길목으로 이동하여 근무하다가 휴전을 맞았다.이렇게 지금의 60~70대와 미군들은 젊은 시절,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분투하여 건전한 국가를 건설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우리들의 고초를 생각지 아니하고 보수니, 수구니 하여 무조건 천대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다시 한 번 생각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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