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가운 사람이어야 하는건데...

2004-06-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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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녀(수필가)

늘 가까이에서 우리를 아껴주시는 분이 음악회에서 만나자고 티켓을 보내주셨다. 늦은 시간이어서 주중에 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 분들을 뵐 겸 16세의 어린 바이얼리니스트가 카네기홀 아이작스턴홀에서 연주를 한다니 자랑스럽기도 해서 기쁜 마음으로 맨하탄에 나갔다.

입구에 벌써 빽빽이 인파가 몰려 있었다. 아는 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인사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과는 대화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은 목소리일 때는 되돌아서서 인사도 하고... 아직도 만나서 반가운 이들이 많이 있다는 일이 새삼스럽게 감사히 느껴졌다. 전과는 달리 이 세상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들이 종종 들리는가 하면 뉴욕을 떠나 늙은이들이 살기 좋다는 캘리포니아, 플로리다로 떠난 이들의 소식도 심심찮게 듣기 때문이다.

반가운 이들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느라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한 나에게 남편이 한쪽을 가리킨다. 가서 인사하라는 말일게다. 고개를 돌려보는 순간 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나중에 인사해요”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남편의 소매자락을 당기면서 우리는 연주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포니테일의 앳된 소녀가 어려운 곡을 피아노의 반주도 없이 생동감 넘치게 해내는 연주를 감명깊게 듣고 세계적인 연주자가 꼭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모든 관객이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뜨거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늦은 밤에는 한 시간에 하나뿐인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부지런히 연주장을 나오는 중이었다. 마치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연주장을 꽉 메웠던 그렇게 많은 이들 가운데 연주 시작 전에 인사를 나중으로 미루었던 그 분이 바로 옆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어떤 단체의 모임에서 알게 된 분으로 그 분과는 모임에서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의견의 차이가 있곤 했다. 음악감상 잘 하고 집에 가시는 길인데 내가 눈에 띄어 마음 언짢게 해드릴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나 나름대로의 배려 때문에 그 분의 눈에 띄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어머나,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옹졸한 마음, 즉 섭섭한 일들을 잊어버릴 수 없는 좁은 마음을 아직도 달고 다니네?

내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인(哲人)도 아니고 더욱이 도(道)를 닦는 불자(佛子)도 아닌 보통사람이니 그렇지. 그나마도 얼굴을 마주칠 때는 웃으며 인사는 하지 않아? 그것만이라도 나에게는 엄청난 노력 끝에 쌓은 결실인데… 어떻게 하지?” 답은 “더 수양해야지”이다.

주위에서 간혹 싫은 사람들끼리 부닥치게 되면 분명 내가 알기로는 그 사이가 아는 사이인데도 인사 없이 그냥 지나간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면 이 세상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어들텐데 하면서 무척이나 의아한 생각이 들곤 했었다.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야”이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어떻게 그 상대방으로부터 아름다운 나로 비쳐지길 바랄 수 있겠는가! “더 많이 수양해야지”이다.

창조주께서 우리 인간들에게만은 동식물과는 다르게 인간들을 사랑하는 창조주의 심성을 닮을 수 있는 선택의 힘을 주셨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노력하면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함께 사는 법을 알게 되고 누구와도 반가운 만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나서 다정히 이야기 나누고 싶고 반가운 사람이어야 하는 건데… 앞으로 더 열심히 도(道) 닦아보자”라고 나 자신에게 당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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