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25와 역사적 교훈

2004-06-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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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남(전 재향군인회장)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인하여 국토는 파괴되고 군인들은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고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갔었다.

문공부 옛 자료에 의하면 아군의 피해(유엔군 포함)는 48만명이고 북한군은 182만명이다.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600만이 넘는다.6.25동란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났다. 아버지는 군에 가셨고 어머니와 식구들이 서울에
서 걸어서 남쪽으로 피난가며 갖은 고생 다 하다가 어머니가 먹을 것을 구하려고 시골에 가신 후 중공군의 남침소식에 놀라 함께 있던 친척은 우리 3남매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얼어죽어 있었고, 신음하며, 또 많은 고아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나도 하도 배가 고파 뒤뜰에 나가 풀뿌리를 캐 먹었다. 추녀 밑 양지바른 곳에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영리한 누나가 기억력을 되살려 어머니 계신 곳을 찾아가야만 산다고 결심하여 천안에서 부곡 영등포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빈 집 있으면 들어가자며 옷 조각으로 신을 만들어 신고 계속 걷는 도중 포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곳이었다. 전투중인 미군들이 손짓을 하며 트럭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포탄을 피했다.

우리는 고생끝에 아직 완전 수복이 되지 않은 영등포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기다리던 어머니와 만나 목숨을 건졌다.미국은 우리 조국을 공산침략에서 건져주었고 1953년 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므로 또 지금까지 50여년간 지켜주고 있다.

3년간의 치열했던 전쟁을 통해 5만4,000여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0만8,000여명이 부상 당했다. 팔다리를 잃었거나 시력을 잃었지만 살아서 미국에 돌아온 것을 감사하며 한국이 오늘날 잘 사는 국가가 되어서 자기들이 피흘려 싸운 보람이 있다고 병상에서도 회고한다.

조국의 일부 젊은이들이 반미 촛불시위를 하며 일부는 미국에까지 와서 백악관 앞에서 시위했다. 또 훈련중인 미군 탱크에 올라가 성조기를 끌어내리고 미군 철수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조국에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얼마 전 미국방장관이 미국은 미국군대를 원하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곳에만 미군을 주둔시킬 것을 강조하며 분쟁지역의 미군 증원을 위해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미군 철수는 이북 공산당이 적화통일을 위해 휴전후 50년 동안 부르짖었던 구호다.핵을 보유하며 전쟁무기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위협에 전방에 배치된 미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화 된 나라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라. 1949년 자유중국의 장개석 국부군이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져서 겨우 고급 군인들만 대만으로 도망갔다. 나머지 도망 못간 국부군은 포로가 되어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다가 죽고 갖은 위협에 시달렸다.

1950년 한국에 전쟁이 났는데 세뇌교육 받던 국부군 출신들이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었던 인해전술에 총알받이로 참전해 수십만이 죽었다.우리 조국에 비참한 전쟁은 막아야 한다. 6.25 때 납치됐던 사람들, 어떻게 죽어갔는가.

1,000만 이산가족의 슬픔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연세대학교에 다니다가 공산주의 사상에 반해서 6.25 때 이북에 건너갔다 고정간첩으로 남한에 내려와 활동하다 자수한 사람이 공산주의에 속은 자기의 청춘을 후회하며 수기를 썼다.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53년만에 가평 전투에서 전사한 나상병의 시신이 발굴됨으로써 형제들이 알게 된 사실도 있다. 고시공부 하던 한 젊은이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누가 피로 물들였던가. 그럼에도 어찌 6.25를 잊으랴.

6.25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된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조국을 지켜주고 있는 미군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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