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귀에 음악소리가?

2004-06-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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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지난 14일밤 카네기홀 아이작 스턴홀에서 대전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브루흐와 차이코프스키에 오랜만에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밤을 느낀 한인들이 많았을 것이다.고향의 내음, 고국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무대를 지켜보며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잠시 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난 삶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며 고국의 오케스트라의 성숙한 모습에 자부심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이날 연주를 감상하며 떠올린 단어는 ‘조화’(調和)와 ‘상생’(相生)이었다.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의상대사의 표현을 빌어도 좋다.


제1 바이얼린을 비롯 제2 바이얼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각 연주자들이 고유의 소리를 내지만 전체가 어울려 하나의 소리로 조화되어야지 혼자서 뛰어나게 잘하거나 튀게 잘하면 그 소리는 조화를 깨뜨려 불협화음을 내고 만다.

때로 크게, 때로 작게, 때로 천천히 노래하듯이 지휘봉 끝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피어나게 하려면 연주자들은 절대 화음을 위해 정신 집중을 해야한다. 싸움도 갈등도 시기 질투도 깡그리 잊고 오로지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한다.

오케스트라는 각 연주자의 개인적 연주 기법보다 전체의 동일한 연주기법을 중시하며 절대적으로 집단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 앙상블과 팀워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우리는 최근 화해와 상생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정계에서도 쓰고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쓰고 남북 관계에서도 쓰고 국제적 분쟁지역에서도 쓴다.

오해와 불신의 시대를 지나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온 것, 서로의 반목을 깨고 화해와 상생의 시대로 가자고 너도나도 외친다.최근 남북 정상회담 4주년을 맞아 ‘자유의 소리’는 마지막 방송을 했다.

비방의 소리가 평화와 화해의 소리로 되며 남북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여전히 북핵문제, 경협문제 등은 남아있지만 그동안 산적한 적대적 관계를 우호적으로 전환코자 하는 몸짓은 보여준다 국제적으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이 상존하는 공간인 예루살렘에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아주 오래전, 아마도 중학생때 였을 것이다. 제목도 주인공 이름도 다 잊어버린 흑백영화지만 라스트 신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여주인공이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 중 다른 사람과의 키스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오로지 한사람과 키스를 할 때면 귓전에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남자지만 그와의 애정 표현에는 늘 귓전에 음악 소리가 들리니 그녀가 마음을 열자 발견한, 그 소리를 쫓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늘로 쭉쪽 뻗어간 푸르른 나무에서, 적막하나 오랜 전통의 거리에서, 잘 가꾸어진 뜨락에서 귓전에 들리는 음악소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오케스트라가 춤추는 나비처럼 우아한 소리를 내고 웅장한 소리로 쾅쾅거리며 호소해도 내 마음의 문이 꼭 꼭 닫혀있으면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주의 깊게 듣고, 느끼고, 이해하면 저절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사랑도 생겨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생긴 것이 틀리다고 해서 소 닭 보듯 하지 말고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자. 아무리 적대적 관계라고 해도 잘 들어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며 도와주고 싶어지고 양보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다면 그 사람은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소한, 지극히 작은 일에도 행복하다면 그 사람의 삶은 그것으로 축복이다.

이날 조국에서 날아온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행복한 밤을 느꼈다면, 오케스트라가 내는 절대화음이 조화와 상생을 거쳐 다같이 사는, 평화에 도달하는 길이었음을 뉴욕 한인들은 감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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