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버지는 외롭다

2004-06-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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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예전 한국의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아내나 자식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가장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 가운데는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괄시를 받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미국에 이민온 한인 아버지들에 그런 이들이 더욱 많다. 그들은 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서 외롭고 쓸쓸히 지내고 있다.

아내들은 여기 저기 일거리가 많다. 바느질이나 식당, 잔칫집, 베이비시터라도 해서 용돈을 벌고 있는데 그들은 할 일이 없어 여기 저기 배회하며 갈 곳을 찾고 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조기 은퇴, 돈도 못 벌고 그렇다고 해서 막일이라도 맡겨주는 곳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경제력을 잃은 이들의 심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민 오기 전 그래도 한국에서 살 때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때때로 호통까지 쳐가며 살던 위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샌가 나이가 들면서 돈을 못 버는 신세가 되고 보니 이래저래 위상은 말이 아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내나 자식, 손주들로부터 눈총을 받으면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신세다. 아내 경우 건강만 하면 여기저기서 오라 하는 곳이 있어 돈을 만질 수 있다. 손주들에게도 용돈을 줄 수 있고, 아들이나 딸네집에 음식을 해주거나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기 때문에 딸이나 사위, 아들이나 며느리로부터 ‘장모님’ ‘어머님’ 하며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아내의 발언권이 쓸모 없어진 남편보다도 세지게 마련이다. 일부 남편들은 아내의 파워에 눌려 기가 죽어 지낼 수 밖에 없다. 아버지 경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일거리가 없어지는 데다 어딜 가나 딱히 기다리거나 찾는 사람도 없다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약해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 사는 맛을 잃게 된다. 이들이 바로 60대 전후의 노인들, 지금의 한인 경제를 우뚝 세운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 나이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통 70년대 이후 미국에 온 한인 가장들이다. 이들의 다수가 이역만리 머나먼 미국 땅에 와서 가족들을 위해 실컷 고생하고 병든 상태에서 외롭고 서글픈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미국에 이민와 가족들을 위해 누구보다 몸을 아끼지 않고 온갖 노동을 다하며 야채, 과일 가게, 세탁소 등지에서 뼈가 빠지게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제
머리칼이 히끗히끗, 각종 질병으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그런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들을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푸대접을 하고 있다. 노인이 된 아버지들 중에는 나이가 많아도 아직까지 전문직을 갖고 있는 사람, 일찍이 노후를 대비해 연령 제한 없이 뛸 수 있는 연방우체국이나 부동산 잡 같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사업에 성공해서 돈이 많거나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 직장에서 몇 십 년씩 봉직하다 나이가 되어 은퇴 후 연금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 등이 있다.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업이 잘 안돼 경제적 기반이 없거나 아니면 연방정부로부터 소정액의 보조금을 받으며 사는 다수의 노인들이 문제이다. 이들은 이민온 기간과 상관없이 대부분 가정에서 내몰려 방황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화투, 마작, 포커 등의 놀이로 무료함을 달래는 사람들이 많다. 그나마 이것도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이로 바뀌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신세한탄을 하거나 가족들에 대한 푸념으로 시간을 죽인다. 이것도 건강하지 않거나 외곽지에 사는 노인들 경우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자식과 손주들의 눈치만 보고 산다.

돈 없고 몸 아프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삶은 없다.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죽어라 뛴, 한인 아버지들의 이런 삶을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솔직히 이들이 없었으면 가정과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20일은 미국의 아버지날이다. 이날만이라도 이들의 노고를 다시 한번 기억해 봐야겠다. 어머니날만 떠들썩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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