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터줏대감의 횡포

2004-06-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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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한국의 6.25동란 당시 대전을 거쳐 대구로 피난을 간 초등학교 5학년의 나는 피난살이 어려운 생활에 우선 먹을거리도 벌어야겠다는 초조한 심정에 판대기를 줏어다가 구두닦이 통을 만들어 어깨에 메고 대구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나간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터줏대감이 무서운 줄을 거기에서 배웠다. 남의 구역을 침범했다고 여러 명의 구두닦이 터주로부터 늘씬하게 맞았다. 법에도 없는 터주들의 권리, 그러나 터주들의 횡포는 엄연히 있었다.

미국의 주류사회란 자타가 알게 모르게 백인사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는 백인들이 터줏대감인 셈이다. 이 터줏대감들이 이민정책을 세워놓고 이민을 받아들이자고 했을 때에는 우선 자국에 잇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부족, 빈곤한 다민족 문화 창출, 고급 두뇌의 수입 등, 미국의 정치가 해결할 수 없던 여건에서 이민의 문호가 열린 것이지 피이민자들만의 선택과 요청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한국의 국내 사정과 생활경제의 불안, 밝아보이지 않는 미래의 미로 등등 때문에 봇짐을 싸들고 이민길에 나섰던 이민 1세들.

이민 1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살았다. 편안하게 자라난 아이들은 왜 우리 부모가 피난민처럼 정신없이 살았는지 다 커서야 한 구석을 이해하면서 부모의 등을 쓰다듬어 준다.

그래, 피난민! 6.25 동란을 겪은 이민 1세들은 고난과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인생은 전쟁, 그 때 겪은 어려움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는 강한 힘을 저축해 두었지! 그런 경험은 이민이란 새 생활의 터전을 닦는 데에 어떠한 보약 보다도 힘이 되었지.

그렇다. 화단에서 자란 화초는 꽃이야 인위적으로 화려할런지는 몰라도 야생화 보다는 줄기가 약하고 가뭄에 목숨이 약하다.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수로 시달림을 알 것이며, 머리, 어깨, 무릎이 쑤시는 걸 어찌 알 것인가! 우리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지. 우리들의 마음을 덮어주는 따스한 하늘을 바라보고, 얼굴을 때리는 터주들의 이상한 눈초리와 찬서리
를 벋겨 냈었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잔소리, 등 뒤에서 떠드는 소리, 돌아가라는 소리, 다는 아니지만 반이민쪽을 옹호하는 소수의 백인들은 고약한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저희들은 입국 비자도 없이 배를 타고 쳐들어와 무력으로 원주민을 밀어내고 이 땅에서 정착한 불법이민자들이 아니었는가? 영국의 법전을 빌려다가 미국의 헌법을 기초한 저희들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이 땅에 왔다고 늦게 온 이민자들에게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려 든다. 그걸 보고 치사하고 더럽다고 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아직은 저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데, 죄라면 한 발 늦게 이 땅에 온 죄 뿐인데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잔소리가 심해진다.으시대며 어루는 사람을 보면 허리춤에 손을 끼고 허공을 한 번 본 다음 몇 마디를 가르치듯 거만하게 말한다. 나는 그걸 보고 참 다행이다 싶었다. 지각도 죄라면 죄일테지만 그 덕에 우리는 터줏대감들 앞에서 땅을 보고 머리를 숙인다.

그래, 시작이 땅이며 끝도 땅이지. 먹는 것이 모두 땅에서 나고 땅에서 난 것을 먹다가 죽으면 보답하는 마음을 싸가지고 땅으로 가지.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이 세월에 주인이 어디 있으며 나그네가 따로 어디 있겠는가. 마음을 다스리니 천지의 터줏대감이 또한 나 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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