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극과 인생

2003-12-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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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목사 사모가 “아무래도 이경희 권사는 한국학교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아요”라는 말을 하실 때마다 나는 36년 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연극이다. 이제 연극은 다 끝났다” 애들 아빠의 나이 34세에 심장수술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거의 혼수상태 속에서 나에게 던진 말이다.그렇다. 인생은 분명 연극과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무대 위에서 자기가 맡은 배역의 연기를 다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면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인생, 연극, 역할, 배우, 이러한 단어들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인생길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들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살고 있다. 가정에서의 역할, 사회에서의 역할 등, 크고 작은 역할이 있고 지극히 미미한 역할이 있는가 하면 막중한 역할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역할들은 다 나름대로 소중한 것들이다.


먼저 간 그이가 원망스러우면 ‘누구는 34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 씨 뿌리는 역할의 연기를 하고, 누구는 혼자 오래 남아서 그 씨를 기르고 거두는 역할을 맡았단 말인가’ 하고 오열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을 살면서 내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내어 그 아이들이 또 자녀를 낳았으니 그 씨가 단단히 결실을 맺고 있는 것
은 사실이다.

그 뿐이랴.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아니, 중단할 수도 없었다. 22년간의 한국에서의 교직생활도 부족하여 이곳에 와서 20여년의 교단 세월을 더 하였으니 어찌 아니 소중하지 않겠는가. 막막하기만 한 인생길을 가정에서의 역할과 직장에서의 역할을 병행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한결같이 쉬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목사 사모가 무심코 던진 말이지만 어쩌면 그 속에 나의 인생 배역의 의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세계를 주름잡고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하거나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그런 막중한 역할을 맡은 배역은 아닐지라도 내가 맡은 지극히 작은 이 배역을 나는 사랑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던 2003년의 연말을 보내면서 나는 나의 인생 5막7장 중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3막이 끝났는지 4막, 아니 5막이 끝났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어느 한 막이나 장이 끝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동안 봉직해 왔던 한 학교의 장의 배역을 내려놓고 이제는 또 다른 협회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 배역을 맡긴 분에게 더 이상 힘들어서 못 하겠다, 더 좋은 배역을 달라는 등을 주문하지도 떼 쓰지도 않았다. 그저 겸허한 자세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역을 맡을 것이다. 그 역을 맡기신 그 분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실테니까.

이 경 희
(재미한인학교 동북부지역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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