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생활

2003-12-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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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출근시간마다 엄마와 나는 전쟁을 치른다. 한쪽은 빨리 출근하라고 성화고 한쪽은 20년도 넘게 들어온 잔소리, 이젠 적당히 한쪽 귀로 흘리고 묵묵부답 서두르는 법도 없이 준비한다. 가끔 혼자 걸어갈거라며 사뭇 겁을 주는 엄마를 향해 “풀타임 직장도 아닌데 그리 열심이시냐”면서 슬슬 엄마를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가 무궁화상조회에서 하시는 일이, 그리고 상조회가 위치한 경로회관에서 이루어지는 만남들이 엄마의 생활에 얼마 만큼의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첫 출근에서 돌아오셨던 날을 잊지 못한다.엄마는 마치 아이같은 웃음을 웃으시며 “야, 나 오늘 영계 소리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출근이 어언 1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엄마와 저녁 식탁을 마주하고 엄마의 하루 일과를 들으며 나는 KCS(뉴욕한인봉사센터)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이민 1세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코로나’와 ‘플러싱’ 두 곳의 경로회관, 무궁화상조회, 공공보건실, 이민봉사실, 교육개발원, 브루클린 사무실, 뉴저지 사무실을 통하여 한인 지역사회의 성원들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개인과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광범위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개발하고 전달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로 인해 한인사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지막(죽음)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일을 당했을 때 정중하게 모시겠다는 지혜는 우리 1.5세나 2세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어르신들의 깊은 사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때 숙연함 마저 느낀다.

경로회관의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영어교실, 음악교실, 컴퓨터교실, 건강체조, 각종 세미나 등이 있고 메디케이드 신청, 아파트 신청 및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점심을 배달하는 일 등 많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경로회관을 방문해 보면 이렇게 멋진 회관과 프로그램이 한국 어르신들께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의 경우, 엄마는 소위 말하는 컴맹이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신문을 보시는 것을 보면 곧 LA에 있는 손자에게 e-메일을 보내실 것 같다.

어느 날은 나도 모르는 미국 국가를 배워 오시더니 미국 역사에 대해, 여기서 대학원을 나온 나를 가르치실 때가 있다. 지식이 부족한 자신이 부끄럽기 보다는 엄마의 배움을 향한 열정과 KCS 프로그램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물론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 뒤에는 오랜 동안 애쓰신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고 무엇보다 코로나 회관의 경우, 장소를 흔쾌히 제공해 주신 뉴욕그리스도교회의 정춘석 목사님의 사랑이 묻어있는 줄 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한 젊은 1.5세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기관과 커뮤니티 내 돌아가는 일들을 1.5세 및 2세들에게 알려 그들이 한인 노인 복지라는 이슈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 생각된다.

출근길 바람이 차가와 졌다. 겨울은 춥지만 따뜻한 이웃과 함께 하는 엄마의 삶은 훈훈할 것 같다.

박승민(엘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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