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영웅 없는 시대의 영웅은?

2003-12-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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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참으로 뒤숭숭한 연말이다.

물 건너 고국 땅에선 대통령이 바뀐 지 언젠데 국민들은 길거리에 나가앉건 말건 정치인들은 대선자금으로 계속 싸우고 있다. ‘대쪽‘ 이회창이 스스로 “감옥행 불사”를 외치니 조만간 수의(囚衣) 입은 모습(정말이지, 더이상 정권이 바뀐 후 감옥 가는 정치인은 보고싶지 않다)을 볼 것 같고 노무현 대통령은 “10분의1”이란 신중치 못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
다.

우리가 살고있는 뉴욕에서는 살인적인 독감 소식에 백신을 맞으려고 사람들이 병원 앞에 구름처럼 몰려든다. 날씨는 본격적인 겨울철에 접어들어 비도 잘 오고 눈도 잘 내리는데 한번 오면 끝장을 보는 것이 12월 들어 두 번이나 내린 폭설은 교통을 마비시켜 한인자영업계 연말 장사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끝났다고 하나 끝난 것이 아닌 듯하다. 저항하는 이라크인들에 의해 연이은 미군의 사망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와중에 14일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생포 소식이 들려 왔다.

화려하기 짝이 없던 이라크 전역의 55개 궁전을 버리고 햇빛도 안 들어오는 흙구덩이 속에서 체포된 후세인은 봉두난발에 허연 턱수염을 길게 붙인 채 미군 앞에 입을 쩌억 벌리고 치아 검사를 당하는 비참한 몰골로 나타났다.

35년간 수백만명의 이라크인과 쿠르드족을 살상한 절대권력자인 그가 아랍에서는 신화적 존재였지만 미군 포로가 되며 그 카리스마적 스타일을 왕창 구겨버렸다. 후세인 가족측 말대로 약이 투여된 것인지, 현상금을 노린 납치 상황이어선지 어쨌든 그런 모습을 전세계에 드러낸 것은 ‘이라크 저항세력의 말로는 이렇다’, ‘천년만년 갈 것같던 독재자의 최후는
이렇다’고 훈시하듯 국제경찰로서 미국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그가 체포되었다고 해서 이라크 전역의 혼란이 정돈된 것도, 지구상의 테러와 폭력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라크에서의 총성은 언제 그칠 지 모르고 있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평생을 두고 사표로 삼고 존경할 만한 사람, 위인이 없는 시대의 영웅은 누구일까. 영웅 없는 이 시대에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바로 우리, 평범한 내가 영웅이 되고 위인이 되자.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남의 자리에 가서 앉지도 말고 자신의 몸 속에 들어있는 생명력, 인간다움을 주위에 나눠주는 것이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차량들이 계속 밀려오고 밀려가는가. 끊임없이 어딘 가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 그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반가이만나 악수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다양한 민족이 모인 뉴욕 땅에 소수민족인 한인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주고 달려가 힘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다.나의 아주 작은 힘을 보태어 그가 힘이 된다면, 위안이 된다면 그에게 생명을 주는 것과 다름없다.

요즘처럼 어수선한 세상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안면 있는 우리들이 공통되는 추억을 만들어가고 그 안에서 서로 행복하다면 그것이 멋진 인생 아니겠는가.

이 지구상은 내가 감당하기 어렵게 너무도 복잡하다.
고국의 혼란한 정계를 내가 바꿔볼 수 있겠는가? 산적한 한인사회 문제점을 내가 해결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도 이 해가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일들이 발치에 쌓여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하고,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겠다면, 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설 자리를 잘 모르겠다면 우선 꼼짝 않고 있어보자.

갑자기 이런 소리가 우리 귓전에 들려오지는 않는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 호걸이 몇 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인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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