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총영사의 부적절한 발언

2003-12-16 (화)
크게 작게
매년 연말이면 각종 송년 또는 신년 행사가 많이 열리면서 눈코 뜰새없이 바빠진 곳이 있다. 축사 또는 격려사를 해야하는 뉴욕한인회나 총영사관이다.

행사 비중이나 친소 관계에 따라 한인회장이나 총영사가 직접 참가할 때도 있고 한인회 부회장이나 동포담당영사들이 찾아가기도 한다.

주말이면 여러 행사의 시간대가 비슷해 ‘겹치기 출연’을 해야할 정도다.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밤마다 행사에 참가해야 하는 모습은 일견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민·관의 최고 책임자들이 나오면 행사 참석자들은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아무래도 축사의 내용이 비슷해진다. 간혹 그 단체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올한해를 돌아보고 내년에는 더욱 번창하기를 바란다는 덕담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12월 들어서면서 일찌감치 시작된 2개의 행사에서 우연히 조원일 뉴욕총영사가 축사를 맡아 행사 관계자 및 회원들을 격려했던 대목이 귀에 거슬렸다. “많은 한국인들은 한미동맹관계를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으로 믿고 있다.”“(미국을 세운) 앵글로색슨족은 철저히 악에 대한 응징을 해왔다.”“미국은 모범적으로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미국에서 자라난 한인 1.5세 참석자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미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주신 최대의 축복’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혈통(?)까지 따져가며 앵글로색슨족의 우월성을 애써 강조하는 모습은 듣는 사람들에게 심한 모멸감까지 안겨줄 수 있었다.

한미관계가 돈독해야 한다는 점은 현실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한국에서는 대등한 한미관계를 모색하는 시점이다--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최대의 찬사를 입혀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예로부터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다. 미국이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뉴욕총영사가 한인이나 미국인들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미국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김주찬(취재부 차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