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파원코너] 바빌론의 신화

2003-12-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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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문명을 낳고, 그 문명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 종교라고 한다.

고대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수메르인들은 지금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에 바빌로니아라는 거대한 신의 도시를 건설했다.

바빌론의 신화는 이렇게 전개된다.태초에 신들만이 살았다. 신의 나라에선 힘 센 자만이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땅의 신 에아(Ea)는 신들 중에서 가장 힘세고 잘 생긴 태양의 신 마르두크(Marduk)를 낳았다. 마르
두크는 많은 사생아를 낳은 바다의 신 티아마트(Tiamat)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르두크는 어렵고 위험한 싸움을 벌여 끝내 티아마트와 그의 사생아들을 무찌르고 신중의 신이 되었다.


바빌론의 신화는 혼돈과 질서와의 싸움으로 요약된다. 선과 질서를 의미하는 마루두크는 악과 혼돈을 의미하는 티아마트와의 전쟁에서 이겼다. 태양신의 승리는 곧바로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마르두크는 ‘지구라트’라는 대규모 피라밋(종교)을 지었고, 법을 만들어 신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했다. 신의 세계에서도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깨달았고, 그러한 사고가 인류 최초의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동기가 되었다.

바빌론 인들은 해마다 연초에 11일간의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 기간에는 진짜 왕과 가짜 왕이 싸움을 한다. 가짜 왕측에 선 백성들은 진짜 왕의 실정을 비난하고, 가짜 왕을 옹립, 왕권에 도전한다. 두 왕이 며칠간 싸우는 사이에 혼돈이 계속되고, 축제 마지막 날엔 진짜 왕이 가짜 왕을 무찌르고 다시 왕위에 등극한다. 그리고 또다시 1년간의 질서가 유지된다.

바빌론의 신화는 가나안 지역의 신화에 영향을 주었고, 구약 성서에 상당하게 반영되었다고 종교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성소 지구라트는 성경에서 ‘바벨(바빌론)탑’으로 재현되고,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교도들은 바빌론 또는 가나안 신화의 신봉자들을 의미한다. 어쨌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선 신의 세계를 그린 신화와 실제 세계의 축제가 모두 혼돈과 질서를 주제로 다뤘다는 게 흥미롭다

. 힘있는 자가 나타나 혼돈의 세계를 정리하고, 질서를 되찾고 평화를 구축한다는 것이다.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집트와 함께 기원전 4000년에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궜다. 바빌론 사람들은 바빌로니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한 좁은 협곡지대는 사막 한 가운데서 비옥한 농경지대를 형성했고, 폐쇄적인 이집트와 달리 개방형 구조를 이뤄 국가 흥망과 민족 교체가 심했다. 바빌론은 터키 산악지대의 부족 아시리아에 정복당했고, 이어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로마제국, 몽골, 투르크 제국, 대영제국 등 인류 역사상 최강국들이 언제나 메소포타미아 황금지대를 손에 넣었다.

혼돈과 질서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생긴 문화라고 할 수 있다.이 찬란한 고대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또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을 맞고 있다. 지난 3월 미국의 공격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연합군이 이라크 점령에 성공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테러 공격에 죽은 미군이 전쟁 중에 죽은 군인수를 넘어선지 오래됐다. 뉴욕타임스는 미군의 보복 공격으로 죄없는 민간인이 죽었다는 뉴스도 생생하게 싣고 있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이라크의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은 한국, 일본 등 우방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자치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약속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바빌론의 신화에서 이라크 해법의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즉 바빌론의 왕에게 힘을 실어주고, 법과 종교에 의해 안정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고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저지한 만큼, 미국은 이라크인들에게 정권을 넘기고 그들에 의해 법질서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 바빌론 신화가 가르쳐주는 해법이 아닐까.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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