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영양제 한 방

2003-12-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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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에 지칠 때, 미국에서 한인으로 살기가 쉽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고 어디서 힘을 얻을까. 같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미국에서 씩씩하게 잘 하고 있는 한인들을 만나보는 방법은 어떨까.

먼저, 홍혜경씨가 있다. 11월26일 메트 오페라 휘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으로 분한 홍혜경씨의 공연은 볼 때마다 흐뭇하기 이를데 없다. 제2막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부르는 그의 아리아 ‘신이여 원컨대 남편의 사랑을 돌려주옵소서’는 압권이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의 아리아를 듣고있으면 저절로 경이의 한숨이 나올 정도이니 티켓이 완전 매진된 메트오페라 하우스 수천명 관객이 열광할 만 하다.

화려한 백작부인이 되기까지 20년 이상 각고의 노력과 인내가 따랐다는 그녀는 뛰어난 재능, 마스크, 체구, 연기, 객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등 모든 것이 받쳐주는 지라 그녀의 무대를 대하면 나도 같은 한국인임을 외국인 관객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홍혜경은 12월6일 공연을 남겨두고 있지만 내년 3월 모차르트 희가극 ‘돈조바니’의 시골처녀 체리나 역을 맡는 등 자주 메트 무대에 선다.우리 영화도 수시로 미국 시장에 오고있다. 한국영화 ‘화산고’가 오는 21일 오후 9시 시사회를 시작으로 한달간에 걸쳐 미국음악 전문채널인 MTV(채널 20)에서 상영된다. 영화와 관련된 컴퓨터 오락게임과 온라인 캐릭터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판타지 학원 무협물(싸이더스 제작, 김태균 감독)인 이 영화는 만화와 영화를 넘나드는 액션으로 인기인데, 지난 해 미국 영화배급사 아메리칸 필름 마켓을 통해 미국에 보급되는 것이다.

내년 아카데미 상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출품할 한국영화로 선정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도 소니 픽처스 클래식과 북미지역 배급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10일과 15일, 18일 뉴욕 맨하탄 지역에서 시사회를 가지며 내년 4월에는 뉴욕과 LA에서 개봉된다.

이같은 우리 문화가 미국에 진출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열심히 찾아가 봐주고 성원을 보내는 것이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빌려서 ‘문화상품은 관객의 박수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빗대어 본다.

한인의 뿌리를 지닌 자가 하는 공연, 전시회, 퍼포먼스, 축제 등에 관심을 갖고 보러 가는 것, 동참하여 힘을 보태자. 그것이 다인종이 모인 뉴욕 땅에서 한인으로서 주체성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남는 법이다.

또 하나, 요즘 유엔 본부 4층 대표단 식당에서 열리는 ‘한국음식 축제’에 참가해 보는 것은 어떨까.1일부터 오는 12일까지(월-금요일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 열리는 이 축제에는 일반인들도 참여하여 유엔에 파견된 189개국 회원국 대표단, 사무국 직원들과 함께 한국 음식을 먹으며 김치, 떡, 배 등 우리 고유의 맛 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다.

9.11 이후 까다로워진 유엔 출입이지만 ‘시대의 요구’라 치고, 늘 지참하고 다니는 운전면허증(사진 부착된 신분증)만 보여주면 이스트 리버가 잔잔하게 흐르는 전망 좋은 창가에서 우리 전통의 맛과 멋을 음미할 수 있다.

이처럼 고유한 문화상품은 골치 아프게 설명하지도 시간을 오래 끌지도 않으면서 단박에 사람을 사로잡는다. 한국 문화축제의 일원이 되어, 한국인의 뿌리를 절감하다보면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그 방향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애국자’가 별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꼭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역사는 내가 바꾼다는 다부진 각오 없이도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것, 그래서 편한 것, 내가 잘 아는 것을 대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다시 힘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여유를 얻는 것이다.

미국 주류사회 속에서 잘 나가는 한인들도 어깨에 힘이 빠질 때면 한국적인 것,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찾아가 보자. 풀어져 내리던 몸과 마음에 다시 엔돌핀이 돌 것이다.이민생활이 쉽지 않을 때 ‘조국’이란 비타민 영양제 한 방을 맞는 것도 필요하다.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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