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가식없는 연말 행사

2003-12-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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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행사의 시즌을 맞았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각종 단체 모임을 비롯해 동창회, 망년회 등 연말 행사가 봇물을 이룬다. 유난히 정이 많고 각종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하는 한인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풍성한 연말 행사 한 둘쯤에는 으레 초대를 받기 마련이고 또 기꺼이 참석해 즐거움과 아쉬움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잇따른 연말 행사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음주운전이나 각종 사고를 비롯해 과도한 음주의 후유증으로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말 행사의 어두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연말 행사의 폐해 또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도대체 행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불분명할 정도로 늘어만 가는 요식적인 의례 절차다. 회원들간의 단합이나 친목을 목적으로 한 모임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이나 노인들을 돕는 뜻깊은 행사일 경우 줄줄이 이어지는 단체장들의 인사말, 형식적인 전달식, 기념 촬영 등은 자칫 행사의 취지조차 흐리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마이크 앞에서는 “여러분들의 어려움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등등의 인사말이 나오는 동안 노인들은 한쪽 구석에서 장기를 두거나 잡담하며 지루하게 식사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밥이나 빨리 줄 것이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라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을 과연 행사 주최측은 듣고 있는 것인지.

행사가 끝나면 관계자들이 마련한 별도의 장소에서 서둘러 식사를 하고 빠져 나오기 바쁘다 보면 정작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그들이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올 연말 행사에서는 이런 뜻깊은 자리에서 외로운 노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들의 어려움을 경청하고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진정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단체장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뜻깊은 연말에 불우하지만 소중한 우리의 이웃을 찾는 마음이야 누가 나무랄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선행이 자칫 ‘얼굴만 살짝 비친 뒤 봉투나 전달하는’ 그런 가식적인 행동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장 래 준(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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