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축구는 내 삶을 지탱한 철학”⋯뉴욕한인축구사 산증인

2026-05-06 (수) 08:07:53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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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 뉴욕 시니어 축구회 명예회장

▶ 중·고교 시절부터 ‘빠른 축구선수’ 정평⋯대학·군대서도 선수로 활약

“축구는 내 삶을 지탱한 철학”⋯뉴욕한인축구사 산증인

[홍명희 회장]

▶뉴욕서 축구협회 2대회장 맡으며 뉴욕 한인 축구의 새 장 열어
▶1998년 시니어 축구협회 창설, 아침마다 공원서 노익장 과시

홍명희 회장은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해 90대가 될 때까지 축구공을 놓지 않았다. 그는 평생 축구를 하면서 자신의 신체 단련 및 정신건강을 지키면서 한인사회에 축구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뉴욕대한체육회 초대 사무총장, 뉴욕한인축구협회 2대 회장 외에 뉴욕 시니어 축구회 초대회장(현 명예회장), 미동부 한국OB 축구회 뉴욕지회 초대 회장 등을 지내면서 뉴욕한인사회 발전에 축구로 기여를 많이 한 인물이다.
“축구는 내 삶을 지탱한 철학”⋯뉴욕한인축구사 산증인

[사진1]



■공 하나로 시작된 운명- ‘달리는 소년’의 탄생
홍명희 회장의 인생은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축구공 하나를 발끝에 붙이고 달리던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배재중·고교 시절, 그는 이미 ‘빠르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선수였다. 상대 수비가 따라잡지 못해 “저 아이는 바람을 타고 뛰는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

학교에서 기량이 뛰어난 축구선수로 뛰던 그는 1955년 졸업과 동시에 성균관대로부터 입학 제안을 받으며 그의 축구 인생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한 선수 경력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 군대, 생계, 이민, 그리고 다시 축구. 그의 인생은 늘 축구와 멀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기이할 만큼 강한 인연의 반복이었다.

■군대에서 다시 발견한 ‘축구의 소명’
1957년 입대 후 그는 정훈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제25사단으로 배치된다. 문맹 군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어느 날, 사단 축구팀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선수로 뛰었고, 1년 반 동안 군부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약했다.

이후 상해 노동자치료병원 KCS로 발령받아 응급환자 치료실에서 2년을 보냈다. 축구공 대신 들고 있던 것은 의료기기였지만, 그의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언젠가 다시 뛸 날”이 남아 있었다.

■축구와의 짧은 이별
제대 후 그는 국립정신병원에서 뇌파 촬영 테크니션으로 10년을 근무했다. 이후 한양대 부속병원 건립 시절, 함께 일하던 원장의 제안으로 다시 병원으로 옮겨 1년 반을 더 일했다. 그러나 이 시기만큼은 그에게 축구와 가장 멀어진 시간이었다.


일과 생계, 책임이 그의 발끝에서 축구공을 떼어놓았다. 그는 훗날 이 시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축구를 못 한다는 건, 숨을 잠시 잠깐 못 쉬는 것 같았어요.”

■1973년, 낯선 땅 뉴욕-‘축구 없는 삶’의 고통
1973년, 가족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 롱아일랜드에 정착했지만 언어, 문화, 제도… 모든 것이 그를 다시 ‘초보자’로 만들었다.

그는 낯선 미국 땅에 와서 언어나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기 어려워 시작한 것이 롱아일랜드 소재 주이시 허스피탈에서 10년 동안 잡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마침내 롱아일랜드 힐 사이드 애비뉴에 있는 자신의 소유로 된 카드 가게를 오픈했다. 일은 쉽지 않았다. 가게에서 판매할 신문을 가져오기 위해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났고,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2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민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이렇게 지내다 보니 축구공을 차지 못했다. 그에게 축구는 사치였고, 생존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축구는 내 삶을 지탱한 철학”⋯뉴욕한인축구사 산증인

[사진2]


■뉴욕대한체육회와의 운명적 만남
1978년, 뉴욕대한체육회가 막 설립되던 시기.
초대 회장 오응서 박사가 그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체육회는 모든 것이 미흡했다. 조직도, 예산도, 인력도.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축구협회를 만들자.”

그는 축구 선배 김희수 회장을 초대 회장으로 모시고 선수 관리, 행정, 조직 운영… 모든 실무를 도맡았다.
그리고 2대 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뉴욕 한인 축구의 시대를 열었다.

■코로나 팍에서 시작된 ‘뉴욕 한인 축구 르네상스’
그가 축구협회를 이끌던 시절, 회원들은 코로나 팍에 모여 공을 찼다. 그곳에서 웃고, 뛰고, 서로를 격려하며 뉴욕 한인 축구의 첫 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졌다.

그는 선수 양성에 힘을 쏟았고, 이를 계기로 뉴욕 곳곳에 한인 축구팀이 여러 개 생겨났다. 축구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이민자들의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힘이 되었다.

■1998년, 시니어 축구협회 창설
1998년, 그는 시니어 축구협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매주 토요일 아침 7시, 퀸즈 베이사이드 알리폰드 파크에서 2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함께 공을 차고 있다.

91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운동장에 선다. 혼자 운전해 나오고, 공을 차고, 함께 한 시니어들과 웃고 즐기면서 노익장을 과시한다. 그는 말한다. “축구는 나이와 상관없어요. 공을 차는 순간, 잡념이 다 사라져요.”

■지난날을 돌아보며 “나는 잘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고생도 했지만, 노력한 만큼 얻었어요. 아프지 않고, 정신도 건강하고… 선수들과 함께 지내는 게 참 행복합니다.” 그에게 축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을 지탱한 철학이었다.

■단란한 가족이지만 늘 미안함 남아
그는 현재 리틀넥에 살고 있으며, 부인 조일순 여사와의 사이에 결혼한 두 딸과 5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홍 회장은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해 두 딸을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자동차까지 다 사주고 하면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처럼 가정은 별 문제없이 잘 꾸려왔는데,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밖에서 지낸 날이 많아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앞으로의 꿈 ‘함께 뛰는 삶’
그는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난다. 운동장에 나가는 날이면 새벽 4시에 기상한다. 몸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고, 준비하고, 아침을 먹고, 그런 절차를 마친 후 운동장으로 향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축구는 힘으로 차는 게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서로를 배려해야 오래 할 수 있다.”

그는 감독도 아니고, 국가대표도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 한인 축구의 첫 장을 연 사람, 그리고 90년을 축구와 함께 살아낸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화려한 트로피보다 더 값지다.

그는 축구로 사람을 모았고, 축구로 공동체를 만들었고, 축구로 한 세대를 이어냈다. 홍명희 회장. 그는 뉴욕 한인사회 축구사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축구는 내 삶을 지탱한 철학”⋯뉴욕한인축구사 산증인

뉴욕상춘회 월례회에서 홍명희 회장(앞줄 오른쪽 다섯번째)과 이사 및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인회·평통·상춘회 등서 봉사활동 열심◀
■ 커뮤니티 활동 및 봉사
홍명희 회장은 축구를 하면서 한인 커뮤니티 봉사활동도 잊지 않았다.
20대 뉴욕한인회(1989) 시절에는 부회장으로 봉사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1999)에서도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활동했다.

또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서도 부회장으로 기여했으며, 배제학당 뉴욕동창회 회장(1980), 현재는 상춘회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뉴욕의 시니어들과 교류를 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있다.

홍 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그는 편안하고, 원만하고, 긍정적인 성품의 사람이라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항상 남을 배려하고 모나지 않게 지낸다는 것.
그의 축구 인생이 길었던 이유는 체력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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