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제봉 KOAM 머천트 서비스 대표 . 전 퀸즈한인회 회장
▶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파 미국행 결심

[류제봉·사진]
▶사업 성공 · 실패 반복, 성실함 · 추진력으로 이겨내
▶ ‘코암’ 설립해 한인 소상공인들의 든든한 파트너로
▶ “가족은 비즈니스 성장에 가장 큰 동력”
"하면 된다.”
류제봉 회장의 삶을 움직이는 문장은 단 하나다. 그는 늘 먼저 움직이고, 먼저 부딪히고, 먼저 길을 냈다. 계산보다 결단이 빨랐고, 계획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래서 그는 무너져도 다시 세웠고, 잃어도 다시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를 돌파하는 방식의 기록이다. 그의 삶도, 그의 리더십도, 그의 커뮤니티 정신도 모두 그랬다.
■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사람
1957년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성남중·고를 거쳐 1976년 현 과학기술대(구 경기공업전문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던 그는 상공부 주최 산업디자인 전람회에서 입상과 전국 대학생 디자인 전람회 입상을 거머쥐며 이미 ‘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던 미국 유학 비자를 단번에 받았다는 사실만 봐도 그의 재능과 실력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만든 것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였다.
“더 넓은 세상에서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1983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덴버를 거쳐 캔자스 주립대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인종적 장벽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벽은 단단했고, 잔인했다. 그러나 그는 그 벽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의 소신이 그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덴버에서 갓 태어난 첫 아들을 놔두고 침대가 있는 밴을 몰고 뉴욕으로 향하던 그 순간, 그는 이미 인생의 다음 장을 열고 있었다. 뉴욕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늘 그랬다. 모르면 배우고, 없으면 만들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는 사람이었다.

단란한 가정을 이뤄낸 류제봉 회장의 아들과 딸, 그리고 손주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다.
비어있던 코니아일랜드의 작은 가게를 얻은 그는 ‘하면 된다’ 정신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손님은 뜸했고, 매출은 바닥을 기었다. 직원 월급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 명만 데리고 겨우 버텼다. 가게 안에서 그는 답을 찾지 않았다. 동네 주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먹고 마시는 식습관, 소비 패턴, 일상의 리듬을 읽어냈다.
그들이 즐겨 먹는 야채 캔, 즐겨 마시는 맥주, 여름이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소다와 얼음. 그는 이 작은 조각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세트 소비’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단순히 물건을 판 것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 하며 그들의 생활을 읽어냈다. 그의 생각과 판단은 적중했다.
여름이 오자 해변은 인파로 가득 찼고 그의 가게는 불티나게 팔렸다. 맥주는 동이 나고, 얼음은 모자라고, 소다는 트럭째 들여와도 부족했다.
그는 단순히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변의 계절을 읽고, 사람의 흐름을 읽고, 그 동네의 리듬을 읽어낸 것이었다. 그 7년 동안 돈이 많이 모아졌다. 그는 집을 사고, 런드로맷을 사고, 리커스토어까지 확장했다.
그러나 인생은 또다시 그를 시험했다. 잘못된 인간관계와 AT&T 장비회사 주식 폭락으로 그는 가진 것을 거의 모두 잃었다. 그때 그는 다시 다짐했다. “하면 된다.”
2003년, 플러싱의 작은 방에서 그는 다시 시작했다. 삐삐와 집 전화 시대, 그는 유대계 전화회사에서 배운 기술로 한인사회에 전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셀룰러폰 시대가 오면서 사업은 다시 추락했다.
그때 한 유대인이 말했다. “크레딧카드 머천트 서비스를 해 보지 않겠냐?”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늘 그랬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그는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기록을 세웠고 결국 자신의 회사 코암(KOAM) Merchant Service를 설립했다. 엘라본(Elavon), 웰스파고 등과 제휴하며 뉴욕·뉴저지·커네티컷의 한인 소상공인들에게 결제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코암의 고객은 대부분 작은 가게, 작은 식당, 작은 비즈니스였다. 그는 그들과 함께 성장했고, 그들이 어려울 때 함께 흔들렸다.
그의 비즈니스 철학은 단순하다. “Your business is our business.” 그는 고객을 ‘고객’이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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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말 보다 행동하는 사람
류제봉 회장은 이력으로 설명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삶은 직책이나 연대기보다 살아내는 방식이 더 선명한 사람이다. 무너져도 다시 세우는 태도,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필요한 곳에 서는 책임감, 그리고 “하면 된다”는 단단한 신념.
그래서 그는 직책보다 사람, 성과보다 책임, 말보다 행동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의 삶은 한 이민자가 써내려간 복원력의 기록, 책임의 기록, 그리고 사람의 기록이다.
그는 말한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 이 말은 그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자, 오늘도 힘들게 이민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응원이기도 하다.

류제봉 회장과 그의 부인 앤 류 여사.
“공동체 활동, 직책 아닌 책임에서 시작”
■ 류제봉 회장 삶의 철학
류제봉 회장은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그의 삶을 지탱한 힘은 화려한 성공도, 사업적 감각도 아니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사람으로 버텼다.” 그 중심에는 아내 앤 류 여사가 있다. 사업이 무너졌을 때도, 다시 시작할 때도 그는 늘 “아내가 있었기에 다시 일어섰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지금도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고 골프를 치며 이민자의 길고도 고달픈 싸움 속에서 놓쳤던 숨을 되찾는다.
비즈니스에서는 그의 아내와 함께 큰 딸 유정 씨가 15년 이상 그의 곁에서 함께했다.
코암의 성장 뒤에는 아버지의 힘든 현장을 묵묵히 지켜온 딸의 실무력과 헌신이 있었다.
그의 공동체 활동은 직책이 아니라 책임에서 시작됐다. 퀸즈한인회 부회장이 공석이 되자 그에게 요청이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회장직이 공석이 되면서 그는 자동 승계로 회장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3선 회장, 5년동안 퀸즈한인회를 이끌었다. 특히 한인회관 건립을 위해 모든 시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지원을 요청하다 메린다 켓츠 퀸즈보로청장으로부터 250만 달러의 정부 보조금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우여곡절로 성사를 이루지 못했다. 류 회장은 그 일을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메린다 켓츠 퀸즈보로청장은 류제봉 회장이 이룬 많은 공적을 인정해 2016년 11월11일, 이날을 류제봉의 날로 선포했다.
그는 이후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그 분야 네트워크 확장과 회원 유대 강화에 힘을 보탰다.
지금은 미동부 성남고등학교 동창회장, 그리고 문화 류씨 미주종친회장을 6년째 맡으며 회원 단합과 결속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그에게 직책은 명함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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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