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믿음의 길을 따라 걷다-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

2025-07-17 (목) 07:14:34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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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노은의 독일 인문학 기행

믿음의 길을 따라 걷다-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

아이제나흐 외곽 언덕 위에 우뚝 선 바르트부르크 성.

세상을 바꾼 것은 군대도, 황제도 아니었다. 신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바꾼 한 사람, 마르틴 루터. 그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걸었던 독일의 오래된 길을 따라 걸었다.

소년 루터의 질문-아이제나흐, 만스펠트, 마그데부르크

이른 아침, 아이제나흐의 작은 빵집에서 퍼지는 고소한 향기와 함께 하루를 연다. 동양인이 낯선 듯한 직원은 환한 미소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하며, 소박한 빵과 커피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하지만 루터의 어린 시절은 따뜻하지 않았다. 만스펠트의 광산 마을에서는 가난을, 마그데부르크 수도원에서는 외로움을 배웠다. 그는 라틴어 책을 베고 잠들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광장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니 성 게오르크 교회가 보인다. 루터가 학생 시절 합창단으로 노래했고, 훗날 설교했던 곳이다. 200년 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10년간 출석했다. 말씀과 음악이 200년의 시간을 넘어 같은 지붕 아래 다시 울려 퍼진 것이다. 루터 하우스 박물관에는 그가 들고 다니던 헌금통, 독일어 성경, 루터 부부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그 안의 질문은 아직도 살아 있다.


청년 루터의 망설임- 에르푸르트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벼락을 맞고 맹세했다. 그날, 갑작스러운 폭풍이 몰아쳤고, 번개가 머리 위를 가르며 떨어졌다. 그는 땅에 엎드린 채, 공포에 휩싸여 입을 열었다. “살려주신다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지금은 고요한 명상의 공간이 됐다. 나도 그곳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검은 도제 복장을 입은 젊은이가 걷고 있었다. 지금도 독일의 젊은 도제들은 3년간 세상을 떠돌며 기술을 익힌다. 그 뒷모습에 문득 루터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결심이란 늘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세상을 바꾼 믿음-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 그것은 오래된 권력에 던진 한 사람의 질문이었다. 루터는 교황청의 파문에도 굴하지 않고 책을 썼고, 결국 보름스 제국회의에 서게 되었다. 황제와 추기경, 귀족들 앞에서 숨조차 무거운 그 자리. 그는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외면했지만, 그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그는 추방당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때부터 성경은 권력자의 책이 아닌 사람들의 책이 되었다. 누구나 자기 언어로 신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바르트부르크 성의 조용한 방에서 오래도록 그의 책상과 깃펜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바꾼 건 거창한 연설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써 내려간 조용한 문장이었다.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 루터의 결혼과 마지막 삶

루터는 41세에 파계한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세상을 뒤흔든 개혁가도 결국 한 가정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세 아이는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루터는 아내를 “나의 별, 나의 보스”라 불렀고, 카타리나는 집안일과 손님 접대, 맥주 양조까지 도맡았다. 하루는 루터가 말했다. “내가 카티 없이는 아무 결정도 못 해.” 그 말에 아내는 씩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결정하는 건 설교 제목뿐이잖아요.”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그들의 식탁에는 늘 소박한 웃음이 있었다. 루터는 1546년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여섯 해 뒤 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나도, 그 길 위에 서다

아이제나흐의 좁은 골목에서는 책가방을 든 소년 루터를, 에르푸르트에서는 벼락 아래 떨던 청년 루터를 떠올린다. 그리고 보름스에서는 모든 시선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 창가에서는 글을 쓰던 장년 루터를 그려본다. 그는 떠났지만, 오늘도 그 길 위에는 누군가의 질문과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200년 뒤 바흐의 음악이 그 질문에 화답했듯이, 오늘도 누군가는 삶의 길 위에서 조용히 답을 찾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곽노은
여행 칼럼니스트로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도서관, 중앙시니어센터, 상록대학 초청강사로 활동 중이다.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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