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면서 세상의 것들을 다 알 수도 없으며, 또 다 알 필요도 없다.
영국의 철학자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지만 우리 옛말에는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근심을 갖는다(식자우환識字憂患)”라고 했다. 세상의 것들과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자연의 이치와 사람이 말하는 원리와 주장들을 알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배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할 수 있다면 배움의 자세를 늘 갖는 것이 좋은 것이다.
‘배워서 남주냐?“라는 말처럼 배워서 결코 손해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울려고 해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 있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 수 없듯이 사람은 너무나 무지하고, 가벼워서 깨달음의 수준에 이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려시대에 ‘고려장’이 관습으로 있을 때 한 선비가 당시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갔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봐 걱정되어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놓았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고 한다. 그 아들은 어머니가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는지 몰랐던 것이다.
이것 뿐인가? 건강할 때는 건강이 사람에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다가 실제로 그 건강 때문에 생명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위기를 당했을 때 건강이 제일 귀한 축복인 것을 몰랐다. 함께 사는 가족이기에 소홀히 여기고, 가볍게 여기다가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떠날를 때 그 떠난 자리가 비어있을 때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것 만해도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웠었고, 그때에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이 오히려 기회였었고, 가난하게 살았던 시간들이 축복이었고, 그 때에 만난 사람들이 천사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무지함과 어러석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는 구태여 알지 않아도, 모르고 살아도 오히려 유익되는 일들이 있다. 아예 모르고 살고, 몰라도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그 집의 재산이 얼마인지, 그 사람이 지난 과거에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는 무엇을 하는지 구태여 궁금해야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과 자기 것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서슴없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이가 몇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자녀는 어떻게 되느냐고 친근하게 물어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히려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이 될 수 있다. 미국영어에 ‘네가 하는 것 말고 다른 데 관심을 쓰지 마라”라고 하는 말이 있다.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앞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고생하고, 힘들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그러면 다른 제자 요한은 어떻게 살 겁니까? 라고 물었다. 이 때 예수님은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한복음2`:21-22)
이 세상에는 참 몰랐던 것들과 몰라도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둘 가운데서 모자라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균형을 이루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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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