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곽상희 시인님을 만난 것은 30년 전 이었다. 그 당시 나의 현실은 사면이 막힌 벽처럼 답답한 일상에서 숨 돌릴 틈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연 이었을까? 어느 날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던 중 재미시인 곽상희 시집 ‘끝나지 않는 하루’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첫 장을 넘기자 서문에 -더 큰 눈물 앞에서- 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된 서문에서 “지금 나는 목 칼칼한 들녘에 서 있다” 라는 구절을 읽으며 현재의 나의 모습이 느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시를 읽으며 고통 조차 아름다워 보이는 시의 조화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시를 쓰겠다는 바램이 곽상희 시인님을 찾아간 동기가 되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한 걸음에 달려 간 곳은 뉴욕 퀸즈 플러싱의 체리 에비뉴에 위치한 해바라기 유아원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유아원을 운영하셨다. 그 후 나는 직장이 쉬는 토요일이면 마치 체리를 따러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생님의 숙소가 딸린 유아원 창가에 마주 앉아 사계(四季)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시를 배웠다.
그 때의 기억은 시에 대한 선생님의 특별한 이론보다는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평범한 서정과 선생님의 시 속에 담긴 희로애락을 시냇물 흐르듯 잔잔하게 들려 주셨다. 내가 만난 선생님의 모습은 어려움 속에서도 늘 미소를 지니셨고 이는 당신의 깊은 기독교적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시절 숨 막힐 것 같았던 나의 일상들이 선생님과 시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큰 울림이 되었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창작 클리닉이라는 명칭의 시창작 모임을 갖고 시를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서로 기도 하며 시 창작에 도움을 주셨다.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는 해바라기 유치원을 다른이에게 넘기고 플러싱에 있는 좁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 이후에도 잦은 이사로 어려운 환경의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남달라서 한인 교회와 사회단체 장소를 빌려 시 창작을 위한 모임을 계속하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셨다.
나의 시인 등단도 그때 이루어졌다. 선생님께서는 십여권이 넘는 자작 시집과 수필집과 소설도 출간하시며 한인 사회단체를 위한 왕성한 문학활동도 계속하셨다. 곽선생님의 시에는 깊은 신앙 가운데 내재 된 삶과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사 그리고 젊은 시절에 떠난 모국에 대한 애달픈 향수와 헤어져 사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들이 가득 담겨져있다.
지금도 내게 남기신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곁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시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선생님께서 2025년 4월에 돌아가시기 전 최근 2년 동안은 병원과 요양원을 오가시며 지내셨다.
이 기간이 홀로 생활하시던 선생님과 나의 가장 깊은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요양원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쓰시며 열공하셨던 선생님의 탁자 위에는 성경책과 시를 지으시던 메모지가 항상 놓여 있었다.
마지막 혼미한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강인한 정신력은 나의 삶에서도 큰 양분으로 뿌리 내려졌다. 물질보다 정신의 풍요로움을 더 소중히 여기셨던 모습은 내게 진정한 부(富)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셨다. 선생님의 삶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였다.
하늘에서 영원한 별이 되어 빛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를 뵐 수 없지만 나의 마음에 새겨 주신 가르침과 깊은 정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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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