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한국에서의 성장스토리”

2025-05-23 (금) 07:42:40 임형빈/한미충효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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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5년 10월21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율정리에서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회암사가 자리 잡고 있는 천보산 기슭아래 위치하고 있다. 4살 때부터 천자문을 시작 계몽편, 동문선습, 명심보감, 통감 첫째권, 둘째권까지 마친 후 8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해 약 15리나 되는 길을 매일 도보로 다녔다.

그 당시 학교는 4년제이고 교실도 2개 반쪽짜리 교무실뿐이었고, 교장 하찌마루 선생님과 교사 이승룡 선생 두 분 뿐인 아주 초라한 학교였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 같기도 하다. 5, 6학년은 양주 군청 소재인 의정부에 있는 양주 공립 보통학교에 편입시험을 통해 진학해 의정부까지 2년간 기차 통학을 했다.

6학년 초에 타 지역에서 전근해 오신 새로운 선생님이 계셨다. 숙제를 해가기도 힘들어 했던 내가 아라이 선생님을 만난 후 부터는 밤늦게까지 복습을 할 뿐아니라 예습까지 챙기는 열정이 생겼다. 1학기 성적 발표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80명 재적 중 겨우 중간 성적 밖에 거두지 못했던 내가 8등내 우등생으로 거듭났으니 도무지 꿈만 같았다.


중학교 때는 농과계통의 경성 원예학교를 택했다. 졸업하자마자 교장선생님의 천거로 우의동에 있는 농장에 취직이 되었다. 지금 우의동은 서울시에 편입이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양주군 노해 면에 소속된 지역이었다. 당시 증권 사업으로 성공한 “시라이 도모노스게” 일인사장의 재벌회사가 우의동일 때 수십만 평을 사들여 각종 사업을 펼쳐나가게 되었다.

우의동 계곡일대에는 벚꽃의 명소로 봄철이면 관광객들로 장관을 이룬다. 백운대 밑에는 백운장이란 시라이 사장의 별장도 있다. 그리고 각종묘목이며 관상목을 가꾸는 농원, 배와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 또 채소원 등이 그의 소유이다.

승마용 말도 2필을 기르고 있었다. 이 전체를 관리하는 마쓰기쇼지주임이 있고, 과수원 묘목, 관상목, 농장, 채소원 관리는 나의 책임분야이다. 10여리 떨어진 과수원 농장을 갈 때는 승마를 이용하는 때가 많아 경마에도 능숙할 정도였다.

21세가 되던 해 일본 증병령에 의해 군에 입대했다. 당시 대동아 전쟁 중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입대하자마자 북만주 소련 국경지역 또 남양군도 일선지로 직접 끌려가게 마련이었으나 나는 고등교육 받은 사람이라 하여 장교로 양성목적으로 용산에 있는 222부대로 배치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낮에는 고된 훈련도 받지만 때로는 남산 밑에 방공호 파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외조부께서 왜정 때부터 설립 운영하시던 강습소 (후일 초등학교로 승격) 교사로 취직 복무 하던 중 경기도 주최 교원 검정 시험에 합격,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 별내 덕정 초등학교를 거처 서울 서대문 초등학교로 전근 시무중 경희대학교 전신인 이시영부통령께서 세우신 신흥대학 야간부 3년을 졸업, 말하자면 주경 야독으로 경희대 제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1947년에는 서울 서대문 초등학교 동료교사인 홍정옥 여사와 결혼하였고, 1952년에는 6,25 전쟁 중 국군에 입대 휴전 후 중위로 예편 제대했으며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화랑 무궁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그 후 1955년에 대한 통운에 입사 과장, 부장, 천안 지점장을 역임한 뒤 1972년에 주식회사 한남 체인 이사 호남 지역 본부장을 역임하게 된 인연으로 전남광주에서 호남 상사를 설립 초대 회장을 맡아 운영 중이었을 때 1981년 미국에 와있던 넷째 딸의 초청으로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임형빈/한미충효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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