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21일,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요동쳤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에 의해 청와대가 습격당할 뻔한 것이다.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의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노렸다. 사살 29명, 북 도주 2명, 남파된 북 요원 31명 중 유일한 생포자는 김신조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생포된 자는 한 명 더 있었다. 김춘식. 그는 김신조에 앞서 한 용맹한 경찰관에 의해 생포됐다. 청와대를 습격한 무장괴한들의 정체가 처음 알려진 것도 김춘식의 입을 통해서였다. 부상을 입었던 그는‘불행히도’ 심문과 무장해제 도중 폭사했다. 북 특수부대원을 처음 생포한 경찰관은 권태경 치안국장 경호관이었다. 지난 9일‘김신조’ 씨의 타계 소식을 듣고 착잡해 하던 권 씨(86)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1.21 사태의 숨 막히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주>
김신조가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대한민국 서울에서 근무했던 57년 전을 다시 기억해 봅니다. 남파공비들이 침투 중 19일 파주 법원리 인근에서 나무꾼 삼형제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계급장도 없는 군복 차림의 괴한 수십 명을 수상히 여긴 나무꾼들이 파출소에 신고하면서 경기도 경찰국을 거쳐 내무부 치안국 상황실에 보고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채원식 치안국장(현 경찰청장) 경호관으로 있었습니다. 채 국장은 정체불명의 부대원을 추적하기 위해 경기도와 서울지역에 비상경계를 하달했습니다. 군에서도 완전무장 군인들이 포위작전을 폈지만 벌써 공비들은 빠져나갔습니다. 우리 군은 시간당 4킬로미터를 행군했지만 그들은 10킬로미터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을 타고 서울 방면으로 잠입한 것입니다.
20일 북한산 비봉 인근에서 숙영한 그들은 일요일이던 1월21일 저녁 사복차림으로 청와대를 향해 산을 내려왔습니다.
밤 10시 좀 못 미쳐 세검정 자하문 쪽으로 내려오는 대열을 자하문 초소의 두 순경이 제지했습니다. “어디서 오는 부대입니까?”라고 묻자 “우리는 특수부대 요원이고 훈련 중”이라 해서 그들 생각에는 지금 비상이 걸려 있어 군 부대가 이동하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앞을 통과하는 그들의 걸어가는 모습이 오리발 걸음이고 국군이 입지 않은 누런색 오바에 창이 없는 방한모자를 쓰고 있는 겁니다. 계급장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나 생각하고 시간을 끌며 무전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청와대를 관할하는 종로서장 최규식 총경은 귀가하지 못하여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신 어머님을 배웅하기 위해 종로서 현관으로 내려간 사이에 무전이 와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프차에 장착된 무전기 소리를 들은 최 총경은 종로서 병력을 대동하고 자하문 근처 과학수사연구소 정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군복 입은 대열 앞에서 정지명령을 하였으나 정지하지 않고, 암호를 외쳤지만 “특수 임무중”이라며 그들은 AK 자동소총을 발사해 최 서장과 종로서 경찰관 수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그 때가 밤 10시경인데 서울기동대 기운관 경감은 400여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도착하여 정체불명 군인들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박배근 총경과 함께 청와대 정문 앞 삼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국장님이 “적군을 알아야 작전이 되는데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고민하시는 것을 보고 경호관이던 제가 교전지에 들어가 한 명 생포를 해오겠다 하고 45구경 권총과 M2 카빈총을 휴대하고 뛰었습니다. 종로서 경찰에 지원사격을 부탁하고 약 500미터 떨어진 과학연구소 정문 가까이 도착하니 정문 가로등 밑에 수 명이 쓰러져있고 최규식 서장님 모자가 보였습니다. 그 옆에 군복 입은 사람이 누워 움직이는 것을 본 저는 약 50미터를 기어가 그 자의 발목을 잡고 뒤로 기어 내려와 종로서 경비과 차에 실었습니다.
청와대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채원식 국장님과 을지로 입구 치안국 정보과 별관으로 생포한 그 자를 데려갔습니다. 채 국장께서 그 자를 살펴보니 목과 어깨 사이에 총에 맞아 부상한 몸이었는데 국장께서 소속을 묻자 북한군 124군 부대 중위 김춘식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31명이 남파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사살 후 청와대 차량을 타고 문산 방면으로 가 이북으로 돌아가고 실패하면 춘천 방향으로 산악을 타고 북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채 국장님이 가슴을 더듬어보니까 수류탄이 6개가 달려 있어 5개를 제거하고 마지막 한 개를 제거하는데 수류탄 핀이 빠지는 게 아닙니까. 채 국장님이 그 자를 뒤집어놓고 누르면서 “수류탄이다”고 외치시기에 채 국장님 등을 눌렀으며 동시에 폭발되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보과장 정상천, 경무과장 박배근, 수사과장 김00 총경 세 분은 현관 뒷문에 붙어 문짝이 부서지면서 넘어졌습니다. 정보과 상황실에는 시찰 중이던 정일권 총리가 계셨고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총리 전용 세단차가 정문 밖으로 달려 나가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김춘식은 경찰 병원으로 보내졌고 국장님 지시대로 육군본부 상황실에 정체불명 31명은 북한 124군 소속 부대원으로 판단되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을지 비상에서 갑호 비상으로 바뀌면서 육해공 삼군과 해병, 경찰의 합동 잔당 소탕작전이 시작돼 서울 상공에는 조명탄이 터지고 방송으로 공비 출현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고 귀가 조치령이 내려졌습니다. 채 치안국장과 박 총경은 저와 함께 국장님 차에 함께 타고 청와대로 가려하는데 무전에서 북한군 한 명이 홍제동 파출소에 있다 합니다. 우리 일행이 홍제동 파출소에 도착하니 순경과 군인들이 “저기 손들고 있는 군복 차림이 하는 말이 북에서 왔수다, 네레 자수하려고 왔수다 해서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또 파출소 직원들은 서대문경찰서로 출동하고 순경 한 명과 군인 3명이 합동근무 중인데 중사 되는 분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미친 소리하느냐고 발길로 차니까 “때리지 마시라요. 내레 정규 군인이 아니외다” 하면서 중얼중얼하기에 서대문경찰서 상황실에 보고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는 치안국장님 모자에 금테가 붙어있는 걸 알아보고 “내무서원국장이요?” 묻는데 국장님께서 저보고 신원확인을 해보라 하셔서 성명을 대라 하자 중위 김신조, 소속부대는 북한 인민공화국 124군 부대이고 목적은 청와대에 침투 후 박정희 대통령 가족을 사살하고 청와대 차량을 타고 무악재, 용주골, 문산을 거쳐 북으로 돌아가는 계획이라 하였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청평, 춘천 방향으로 강원도 산악을 타고 북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증거 되는 무기와 실탄은 어디 두었냐 하자 “저기 군인들에게 네레 손들고 북에서 왔수다 하고 자수한 장소에 가면 숨겨둔 무기와 휴대용 식품 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서 군인 2명과 함께 군용차에 태워 보냈습니다. 자수한 현장인 인왕산 아래 세검정 부근으로요. 잠시 후 김신조 일행이 돌아왔고 AK 소총 등 무기와 미숫가루 엿과 비상식량 등을 가져왔습니다. 김신조는 김춘식의 이름을 알려주자 함께 온 동무라고 하였습니다. 치안국 상황실에 경과보고 하고 중앙정보부로 데려가 조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 채 국장, 박배근 총경과 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만났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진해 대통령별장 경호관 당시 안면이 있고 권태경이란 이름마저 기억해 주셨습니다. 육 여사는 “권 경호관은 대통령과 국민의 경호관”이라고 칭찬해주시고 박 대통령께서는 “충성된 경호관으로 큰 임무를 수행했다”고 하시면서 특진시켜주라고 하셨습니다.
▲ 권태경 씨는
1938년 일본에서 태어나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45년 경북 상주로 피난을 왔다. 61년 해군에 입대, 진해 대통령 별장 경호병으로 복무했다. 태권도 공인 6단의 그는 64년 제대 후 서울경찰 30기로 경찰관이 되었다. 이듬해 양찬우 내무장관 경호관을 거쳐 채원식 치안국장 경호관으로 발탁됐다. 1.21 사태 당시 공훈으로 일계급 특진, 경사로 진급했으며 청량리 파출소장, 기동순찰대 반장을 거쳐 청와대 경호실 파견 근무를 했다.
1973년 노르웨이에 파견됐으며 74년부터 뉴욕 유엔 대표부 파견관으로 부임해 워싱턴에서 활동하다 76년 사표를 내고 메릴랜드에 정착했다. 철조망 제작회사를 거쳐 피시 마켓을 운영하다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