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수에로의 왕후 에스더는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익명 유대인으로 살았다. 안으로는 에스더가 유다 공동체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밖으로는 유다 백성과 격리된 채 왕족의 삶을 살았다.
어느 날 그의 후견자인 외삼촌 모르드개가 찾아와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는 말을 듣고 나서 도저히 동족의 위험을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왕후에 자리에 있는 것이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스더가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왕 앞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을 건 에스더의 희생적 봉사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동족을 위기에서 구원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위치하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을 ‘에스더 효과(Esther Effect)’라고 한다.
(H. A. 아이언사이드의 ‘에스더 강해’ 중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진정한 행복은 봉사의 삶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고귀한 인생의 외길을 걷고 있다. 이 고귀한 삶을 나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처럼, 에스더와 모르드게처럼,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처럼, 오래된 포도원의 장인(匠人)농부처럼 뜨거운 봉사의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한다.
유다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에스더의 봉사가 고귀하고 장엄한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동족의 생명을 구했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봉사의 결단은 삼 일간의 금식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왕후가 왕의 허락 없이 금식하는 일은 금기사항이었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에스더의 금식기도는 특별했다. 에스더와 느헤미야의 기도는 서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유배지의 제국에서 출세한 귀족 유다인 이었다. 동족이 겪는 고난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해 달라고 화살기도를 드리는 이들의 유사성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에스더의 희생적 헌신과 간절한 기도는 하늘 문을 열었다. 멸절 직전의 유다 백성은 살아났다. 모르드개를 모함했던 악의 우두머리 하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뿌리 채 뽑혀나갔다.
어느 날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이 여행 중 호텔에서 일어나 조간신문을 펼쳤다. 전면에 ‘부호 알프레드 노벨이 간밤에 급서하다’라고 특종기사가 실렸다. 노벨은 경악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내면을 강타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사망한 것이고, 기사는 신문사의 착오로 활자화된 것이지만 노벨은 자신의 죽음인 것처럼 인식했다.
가짜 부고장을 받은 노벨은 재산의 대부분을 노벨상 제정을 위해 내 놓았고,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꿨다. 그 이후로 인류는 노벨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것을 우리는 ‘노벨 효과(Nobel Effect)’라고 부른다.
COVID-19 사태 이후 현대사회는 점점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로 치닫고 있다. ‘헌신과 봉사’라는 단어를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작은 한 가지 봉사라도 가볍지 보지 말라.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갖다드린 어린아이의 작은 봉사가 5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풍요한 기적을 낳았다.
에스더의 봉사정신을 현대 용어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한다. 곧 가진 자, 혹은 엘리트의 책임감이다. 래프 톨스토이는 말했다. “인간의 유일한 의미는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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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