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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 ‘접촉가설’

2024-12-23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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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편견은 어디서 오는가. 적대감으로 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나의 평생 연구 과제였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인종 폭동을 연구한 사회학자들이 명명한 ‘접촉가설’에서 찾아냈다.

접촉가설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접촉이 빈번하여 서로 가까운 이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는 폭력이나 적대적 행동을 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군수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 사이에는 아무 불상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만나는 것만큼 서로 사랑할 수 있다.’ (고든 올포트의 ‘The Nature of Prejudice' 중에서)


대만의 북부 타이페이에 살고 있는 한 청년이 멀리 남부의 산간지방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을 열렬히 사랑하고 연모했다. 청년이 그리운 마음을 누르지 못해 결혼해달라는 내용의 연서(戀書)를 수없이 써 보냈다.

편지의 숫자가 2년 동안에 무려 700통이나 되었다. 2년 후 이 여성이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혼 상대자는 열렬한 연모의 편지를 써 보낸 청년이 아니었다. 그 상대는 우체부였다. 2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리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배달해준 우체부에게 감동을 받아 그와 결혼한 것이다.

이 여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날마다 만나는 힘, 날마다 반복되는 접촉학습이 인지능력을 높이고 감동을 일으킨 것이다. 물리적접촉과 만남의 힘이 이처럼 놀랍다. 온라인(on line)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을 보라. 직접 접촉을 꺼리는 가상 인물로 인해 이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혼란스러운가. 얼마나 비인격적이고 무의미하고 허무한가.

종교사회학자들이 미국인의 일상생활을 연구했다. 최소한 일주에 한 번 이상 교회에 나와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더 장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종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공동체의식이 고취되어 전인적으로 건강하다. 하지만 사회적 고립감을 안고 사는 사람의 육신과 정신건강은 취약하다.

인간은 원래 사회적 가능이 탁월한 존재이다. 하나님과는 내밀한 영적 존재로 연대(連帶)되었다. 이웃과 서로 상보하고 의지하며 살도록 지음 받았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난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인간끼리는 서로 믿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이 이기주의를 일으켜 하나님과의 소통을 스스로 폐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인간의 가장 교활한 죄는 이기주의와 자기 폐쇄다.”

존 달림플은 말했다. “내가 로널드 레이건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직접 만나 함께 보낸 사실이 있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도 이와 똑같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 인격적인 접촉을 견실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당신은 리더인가. 앱으로 연결되는 비인격적 만남보다 인격에 바탕을 둔 물리적 만남을 힘쓰라.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 시대에 접촉가설은 의미심장하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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