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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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종묘제례(宗廟祭禮)

2024-11-29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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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종묘추향대제(宗廟秋享大祭)를 보러 갔다. 정전(正殿)에는 태조, 태종부터 시작하여 세종, 세조,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왕비와 함께 한 49위의 신주가 19신실에 모셔져 있다. 이 그윽하고 품격있는 정전은 지금, 커다란 기중기가 지붕 공사를 하고 새로 칠을 하는 보수공사 중이라 출입금지다.

그래서 종묘의 서북쪽 영녕전에서 종묘제례(종묘대제)가 이뤄졌다. 1421년에 지어진 영녕전 16실에는 34신위가 있다. 이곳엔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와 업적이 별로 없이 사후 추존된 왕들의 신위가 있다.

영녕전으로 들어가니 이미 수많은 관객들이 종묘제례 무대를 둘러싸고 서있었다. 정전 앞 계단위 상월대에 배치한 등가, 계단 아래 하월대에 배치한 헌가, 제단 동쪽에는 문무백관 차림을 한 이씨 종친 수백 명. 서쪽으로 무용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흑색, 청록색 제복을 입은 제관, 붉은 도포를 입고 금테 두른 검정모자를 쓴 악사들과 무용수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내는 국가 제사의 주관자인 황사손 이원이 등장하고 각 실 담당자가 신주를 꺼내 오면서 본격적으로 제향이 시작되었다. 집례(사회자)가 찬의(인도하고 동선을 돕는 제관)에게 다음 절차를 부르라는 신호로 ‘부로~’라고 하는데 느리고 엄숙한 그 소리에 특이한 중독성이 있었다.

향을 사르고 술을 따라 부어서 신을 모시며 예물을 올리는 순서 사이에 음악과 춤이 연주되었다.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가로세로 8명씩 64명이 서서, 무릎을 굽히거나 방향을 바꿔가면서 오른손, 왼손을 올렸다 내렸다 장엄하고도 정적인 춤을 추었다.

제례악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편종과 편경 소리인데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편종은 둥근 곡선의 종 모양 타악기를 채로 치니 소리가 깡깡 경쾌하고 맑았다. 편경은 각각 다른 크기의 ‘ㄱ ’자 모양 16개 경석이 나무틀에 걸렸는데 여리고도 청아한 소리가 났다.

놓은 곳에 자리한 등가는 양, 낮은 곳에 자리한 헌가는 음, 열을 지어 추는 일무는 사람, 즉 천지인이 우주질서의 상징물이라는 것, 악기 편성은 쇠, 돌, 실, 대나무, 박, 흙, 가죽, 나무 등 8가지 재료가 주역의 팔괘와도 관련, 우주의 질서를 담고 있다고 한다.

관객들은 꼬박 두 시간을 서서 제례를 지켜보며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행사가 다 끝난 다음에 주최 측은 궁중의 제사상 차림을 보고싶은 분은 상월대 위로 올라오게 했다.

제례가 끝나자마자 신주는 재빨리 제자리로 옮겨졌고 그 앞에 황금색 커튼이 내려쳐져 신실안만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제수 40여 가지가 담긴 제상이 왕마다 각각 차려져 있었다. 신실 문밖에는 술과 술잔이 놓여진 술상이 놓여 관객들은 줄을 지어 관람하며 사진촬영을 했다.

이날, 나는 종묘대제를 구경하면서 업적이 훌륭한 왕들이 아닌 역사에서 소외되고 가엾기도 한 왕들의 혼백을 달래주었다는데 의미를 두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인 덕종, 인조의 아버지 원종, 세자시절 사망해 정조를 양자로 입적한 진종,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 사도세자였으나 정조에 의해 추존된 장조, 영월에서 사약 받고 사망한 단종, 일제에 의해 꼭두각시 삶을 산 영친왕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종묘 입구인 북쪽 오른편 후미진 곳에 공민왕 신당이 있었다. 관람객이 전혀 없는 신당에 들어가 보니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서로 마주보듯 나란히 앉아있는 영정과 왼쪽 벽면에 준마도 세 점이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이 종묘를 세우면서 공민왕 시절 벼슬을 했던 은혜를 기리는 뜻으로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 사당 옆에 흰 천막을 치고 전주이씨 후손 여성들이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뒤엎은 새 나라 조선왕조의 작은 양심인가, 공민왕 사당이 있다니 그저 놀라웠다. 그래도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란 훌륭한 왕들을 낳은 조선이 아닌가. 종묘제례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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