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진주는 빛나는 보석

2024-09-23 (월) 윤관호/국제 PEN 한국본부 미동부지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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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아내와 함께 버스를 탔다. 출발한지 3시간 30분만에 진주에 도착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친지가 다른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다가 뒤늦게 이곳으로 차를 몰고 왔다. 반가웠다. 진주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든다. 진주중앙시장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지역 음식을 맛보았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지 중 하나인 진주성에 갔다. 성문으로 들어가니 오른 편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다. 마음 속으로 장군은 물론, 함께 왜군을 물리치신 당시의 호국 선열께 묵념을 드렸다.

왼편으로 걸어가니 촉석루가 나온다. 촉석루는 1365년 건립되었으며 군사의 명을 하달하고 지휘하던 누각이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들어가니 목조건물로 크기가 상당하다. 남강이 앞에 흐르고 있다.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다. 관광객들이 마루에 서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있기도 한다.


누각에서 나와 남강 쪽으로 내려가니 사각형 모양의 의암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적이 침략하여 촉석루에서 승전을 축하 연회가 있었다. 기생으로 연회에 참석한 주논개 열사가 술에 취한 게야무라 로쿠스케 적장을 꾀어 물가로 내려왔다. 이 바위에서 그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아군의 항전의지를 불태웠고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킨 거사였다.

임진왜란 전에 이율곡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일본군이 침략해올 것이니 국방을 튼튼히 하여 대비하자고 했다. 간신배들의 모략과 임금인 선조의 오판으로 전혀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아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이 고난을 당한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순신 장군을 위시한 호국선열들이 나라를 구했다. 그 후에도 병자호란과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했으니 우리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겨 성내를 둘러본다. 야외공연장에서 농악대가 공연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도 관중석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솟대쟁이패 농악’ 이라는 기치가 농악대 가운데 세운 장대에 걸려있다.

솟대쟁이패 농악은 1900년 전후로 진주를 본거지로 하여 솟대놀이와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농악, 대접돌리기, 줄타기 등을 하며 전국을 다니며 활동한 전문연예집단을 말한다. 솟대쟁이패 라는 명칭은 한 가운데에 긴 장대를 세운 뒤 꼭대기로부터 네 가닥의 줄을 늘여 놓고 그 위에서 몇가지 재주를 부린데서 비롯되었다.

공연은 당산굿, 농악판굿, 소고개인놀이, 설장구놀이, 죽방울놀이, 버나놀이, 열두발놀이, 파짓굿놀이의 순서로 진행됐다. 농악의 가락과 장단을 들으며 놀이를 보니 흥겨웠다. 농악을 자주 대하지 않았지만 내 피속에 신나는 음악으로 느끼게 하는 인자가 전해 내려온 것 같다. 마지막에 관중들도 나와서 농악대원들과 함께 춤을 추자고 권유하기에 나도 나가 춤을 추며 웃고 즐겼다.

진주성을 떠나 남강댐 진양호 노을공원으로 이동했다. 고요한 호수와 주위의 숲이 아름답다. 10월에는 남강에서 유등축제가 열린다.

하모는 동의, 긍정을 뜻하는 진주 사투리이다. 하모는 진주의 남강과 진양호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인 수달에 영감을 얻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형상물이다. 머리 뒤 조개와 목에 두른 진주 목걸이는 진주시를 표현하며, 파도무늬 꼬리는 물을 나타내어 진주의 깨끗한 이미지를 상징한다.

진주는 한복판을 흐르는 남강과 월아산을 위시한 명산들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옛날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여러 분야에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진주 출신으로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삼성 1대 회장과, LG 그룹의 창업자인 1대 구인회 회장, 2대 구자경 회장, 3대 구본무 회장 등이 있다.

<윤관호/국제 PEN 한국본부 미동부지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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