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읽은 명작-숨어서 피는 꽃 <김병권>

2024-04-30 (화) 정 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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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서 피는 꽃’을 회상하며

내가 읽은 명작-숨어서 피는 꽃 <김병권>
3년 전 워싱턴 지역으로 이사 온 이듬해 봄, 딸이 선물로 수국 두 그루를 뒤뜰에 심었다. 잎새 사이의 마른 가지를 조심스레 쳐내는데 자그마한 꽃 한 송이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뜻밖의 반가움에 그 꽃을 들여다보며 겪었던 어려운 사정을 묻는데, 문득 김병권 작가의 「숨어서 피는 꽃」 수필이 떠올랐다. 이 수필이 내게 감동으로 다가온 까닭은 나도 우리집 수국을 보고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수필가 김병권(金秉權, 1931년 8월 3일 ~ 2023년 2월 11일)은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에 자진 참전했고, 육군참모총장 홍보관 등을 거친 후 욕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획득했다. <오월의 나비>를 비롯해서 참전 경험을 많은 글로 남겼고, 1971년에 월간문학을 통해 <남국의 향수>로 등단했으며, 『속아주는 멋』, 『물구나무 인생』 등 다수의 수필집을 집필했다.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직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대상과 순수문학 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숨어서 피는 꽃>으로 『오늘의 한국 대표 수필 100인선』에 선정됐다. 본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집 정원에는 지난해 거의 고사 상태에 빠졌다가 되살아난 수국 한 그루가 있다. 평소 화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던 나였지만 막상 죽었던 수국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니 여간 대견스럽지가 않았다. (중략) 겨우 한 송이만의 꽃을 피우고 있으니 좀 빈약하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당당하게 들어내지 않고, 좀 수줍은 듯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 못내 측은하게 느껴졌다. (중략) 꽃나무도 감성이 있는 것일까. 지난해 여름 모진 홍역을 치른 후 저렇듯 자신의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겸허(謙虛)에는 아마도 그 무슨 까닭이 있는 것만 같다. 주변의 꽃들이 화려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저 외톨이 수국한테 더 기울어지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날 저마다 난 체하는 과시욕증후군(誇示慾徵候群)을 떠올려 본다. 그 어디서나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경박한 생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국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도야(陶冶)하는 은자(隱者)의 교훈을 일깨우게 된다.


작가는 고개 숙인 한 송이 수국을 보고 그것에 대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나 사실의 추억을 끌어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의해 수국을 인식하는 추론인 1차 의식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후에 감성적이고 주관적이며 서정적인 생각을 도출시키는 2차 의식인 유추라는 과정이 진행됐다. 따라서 이 글은 1차 의식인 추론과 2차 의식인 유추의 과정을 통해서 수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해 생각을 구체화하고 감정을 부여해서 글로써 표현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친숙한 소재를 세심히 관찰한 후에 느끼는 감성을 정리해서 쓴 수필이라 하겠다.

1960년대에 직장에서 ‘겸손’에 관해 고민한 추억의 장면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병원 회진 시간이었다. 수련생이 제각기 자기는 이런저런 것을 잘했다고 과장에게 본인의 능력을 과시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보통 자신이 없는 사람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언짢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새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상급반 수련생이 넌지시 내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개인 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발달해 아이에게 자기주장과 능력을 주저없이 드러내는 것을 가르치지만, 동양 문화에서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이 중요한 덕목이다. 과시욕으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서 평화와 협력을 방해하는 상황을 경험한 적도 있어 겸손의 깊은 뜻을 되새긴다.

작가는 숨어있는 꽃을 보고 과시욕증후군(誇示慾徵候群)을 갖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겸손하게 수련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공감하는, 핵심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숨어있는 꽃을 발견하면 지지대로 받쳐주고 응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 세실리아

●수필가, 의사 ●명예 교수,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CWRU),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Board Director, 애틀랜타 여성문학회, Duluth Cultural Center, GA ●‘수필 시대’ 수필 부문 등단 (2017) ●저서; 먹구름을 헤쳐가는 밝은 마음(문예 운동사, 2019), 마음이 통하는 대화(도서출판 규장, 2023) ●워싱턴문인회 회원

<정 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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