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타입이 있다. 독수리형 인생 (Eagle mode), 황소형 인생 (Bull mode), 풍선형 인생(Baloon mode)이다.
독수리형은 올라가는 태도, 발전하고 성장하는 인생이다. 실제로 독수리는 하늘 높이 오르기 위하여 세찬 바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바람은 방해가 아니라 높이 치솟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황소형은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황소같다. 용기가 있어 보이지만 높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현실과의 싸움으로만 본다. 열정적인 것 같으나 나의 인생 전체의 큰 목적에서 이탈하기 쉽다.
풍선형 인생은 더욱 허망하다. 무게가 없는 풍선은 사상과 방향을 잃은 존재로서 바람부는대로 떠돈다. 주체성 없는 유랑민과 같다. 신앙을 신을 믿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나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우주의 원칙을 따라 살아보자는 것이 신앙이다.
한때 한국의 최고 재벌이었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위를 보고 걷자는 슬로건은 내걸고 회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나는 일본의 정신지체아들을 양육하는 시요가꾸엔을 견학한 일이 있다. 두뇌 발달이 정지되었다는 불행한 아이들이 교가인 ‘위를 보고 걷자’를 힘차게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런 가사이다.
“위를 보고 걷자/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위를 보고 걷자/ 하늘을 보고 걷자/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걷자. ”
아동문학가 강소천의 동요에 ‘병아리’ 라는 작품이 있다.
“물 한모금 머금고/ 하늘을 쳐다보고/ 또 한 모금 머금고/ 구름 쳐다보고” 신앙을 가진 시인은 병아리가 물을 마실 때 고개를 살짝 살짝 드는 모습을 물을 넘기는 동작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는 마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내가 하트포드에서 목회할 때 어느 날 청년 교우 한 사람의 집에 심방을 갔다. 문이 조금 열려있어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혼자 미국에 와서 열심히 일하던 사람인데 베토벤의 교향곡을 틀어놓고 지휘에 열중하고 있었다.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지휘에 열중하고 있는 게 그가 들추는 악보도 진짜 교향악 악보 같았다. 그는 음악에 온 정신이 쏠려있다. 그는 지금 대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후의 소식은 알 수 없으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무엇을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열정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그럭저럭 바람 부는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무엇을 하나 정열을 쏟으라. 비관형이거나 자포자기형은 좋은 인생관이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은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어서 허망한 욕심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십시오”(에베소서 4:22)하고 말한다. 땅을 보던 인간이 하늘을 보는 곧 위를 보는 인간이 되는 것이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한 병원은 ‘부라이언 간호사의 법 (Nurse Briun’s Rule)’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오래 전에 이 병원에 부라이언이란 간호사가 있었는데 병원에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말만 하지말고 한 번 해보고 결과를 봅시다.”고 주장하였다.
그 병원에 정신병동을 신설하자는 문제가 나왔을 때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자가 많았으나 부라이언 간호사가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정신병동 때문에 이 병원이 더 유명해지고 커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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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