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행복의 조건

2024-01-23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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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톨스토이는 “돈이여,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생겼던고!” 하고 한탄하였다. 옛날부터 돈은 요물이다. 돈은 잘 쓰면 기념탑이 되고 잘못 쓰면 교수대가 될 수고 있다.

돈은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양심 명예 신앙 등은 죽은 사체로 변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열심히 돈을 벌라. 그리고 그 돈을 좋은 곳에 잘 쓰라.” 고 충고하였다. 벌어 모으는데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사용처를 고르는 데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는 교훈이다.


1982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불수레(Chariot of Fire)’ 는 1924년 올림픽 400미터 경기에 참가했던 에릭 리델 (Eric Luddell)의 이야기이다. 기록상 리델이 금메달 후보라는 것은 전세계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승전이 일요일에 있었기 때문에 리델은 경기를 포기하고 일요예배에 참석하였다. 상당히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선수였지만 자기의 신앙에 따라 주일 경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옛날에는 주일 경기 포기는 물론 곁에 흑인 선수가 있으면 그 경기를 포기하는 인종차별주의자 선수들도 많았다.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육상경기에 한하여는 흑인 선수가 백인보다 더 많다. 특히 농구는 그렇다. 올림픽 선수 정도면 수입도 대단한 건데 돈보다도 신앙을 내세우는 선수가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영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만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일년쯤 행복하려면 정직한 인간이 되라.” 이것은 물론 유머니까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확실하다. 행복은 바깥 조건이 아니라 나의 내부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로타리클럽 세계총재를 지낸 토마스 데이비드씨는 이런 말을 했다. “아침이 된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직장으로 행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일하도록 기도를 드린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내가 죽는다면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래도 그러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크리스천이란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필자는 성공률 불과 20%라는 대단히 어려운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수술 후 집에 돌아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뒤뜰에 작은 파란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꽃들은 물론 이 집에 이사온 뒤로 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작아 안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지금에야 그 꽃이 보일까? 죽음의 고비를 넘긴 내가 달라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돋이의 기적, 아기의 탄생, 포옹의 따뜻함과 축복받은 식탁, 계절 따라 바뀌는 색깔의 조화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과학자들의 놀라운 발견과 발명, 예술가들의 저 아름다운 창작과 자유를 향한 우람찬 행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만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궁상맞고 청승맞게 살지말자. 질투하고 경쟁하며 살지말자. 만족하고 행복을 깨달으며 살아야 한다. 천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늘을 천국으로 알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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