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영혼의 닻

2024-01-09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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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희망을 닻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희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히브리서 6:19) 배가 닻을 내려야 안전하고 풍랑 속에서도 평화로운 정박을 할 수 있다. 희망이 끊긴 사람은 어디로 떠내려 갈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겨울같은 내 가슴에 햇빛이 미소 지을 때 얼마 안가서 봄꽃이 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나니.” 하고 인도의 시인 타골은 읊었다. 희망을 가진 자의 정신이 얼마나 싱싱하고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남보기에도 답답하고 우울하게 보인다.

윈스틴 처칠 경의 유명한 1분 강연이 있다. 영국이 독일 공군의 폭격을 남마다 받아 매우 어려울 때 처칠 경은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졸업생 여러분, 포기하지 마셔요. 포기하면 안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는 1분 연설을 하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졸업생들은 큰 감격을 받았다고 한다. 스스로 모든 고통을 겪고 살아온 처칠 경의 생애를 알기 때문이었다.


영국 속담에 “마음 속에 푸른 나무를 가꾸라. 그러면 노래하는 새가 찾아올 것이다.”는 말이 있다. 여기의 푸른 나무는 희망을 가리키고 새는 행복을 가리킨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나타낸 속담이다.

희망은 피와 같다. 이것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생동력을 잃는다. 바울도 “사랑이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즉 희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희망이 사람의 동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전진의 원동력이 희망에 있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에게 희망을 둔다는 뜻이다. 희망을 품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 단테가 말했듯이 ”희망을 버려보라. 그대가 갈 곳은 지옥뿐이다.“
1세기의 역사가인 요세프스는 초창기 기독교를 이렇게 평하였다.

”사람들은 새 종교인 기독교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듯 관을 메고 노래를 부르며 관을 운반하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천국에 간 것으로 실감있게 믿었기 때문에 즐거운 낯으로 찬송을 부르며 관을 메고 행렬하는 장면을 보인 것이다. 영원한 천국에 희망을 두었던 초창기 기독교도들의 생생한 신앙을 잘 드러냈다는 것이 역사가의 평이다.

용서에 3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이해하고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미운 사람을 이해하고 잊어버리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그에게도 희망을 품을 때만 가능하다. 절망하면 이해도 사랑도 용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희망을 품으면 사랑할 수 있고 용서도 가능하다.

배우 새리 아담스는 뛰어난 미모와 연기로 그녀가 서는 무대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런 그녀가 폐결핵에 걸렸다. 무대에서도 멀어지고 인기도 사라졌다.

시골에서 휴양하던 아담스가 성경을 읽다가 야곱의 이야기(구약 창세기 28장)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집에서 쫓겨나 외톨이가 된 청년 야곱이 꿈에 하늘에 연결된 사다리에서 천사들이 춤추는 황홀한 광경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재기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담스는 다시 무대에 섰으며 이전보다 훨씬 나은 연기를 보여 재기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아담스는 감격에 차 한 편의 시를 썼다.

“내 고생하는 것 옛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가까이 가렵니다. ”(364장)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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