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용과 가붕개

2024-01-04 (목) 폴 김/전 재미부동산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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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며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에 지렁이와 치(稚)가재, 피라미, 올챙이가 살고 있었다.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구비구비 흘러가는 개천은 그야말로 생명의 터전이라 할만 하다.

시냇물마저 비껴가는 조그만 바위 밑에는 다닥다닥 붙어 은신하고 있던 치가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이내 총총히 사라지고, 개천의 가장자리와 바닥에는 지렁이가 종횡무진 다니며 연신 흙을 먹었다가 뱉어내고, 시냇물에 쓸려 빚어진 군데군데 패인 작은 웅덩이에는 포도송이처럼 열려 있던 개구리알에서 갓 깨어난 올챙이가 꼬물꼬물 몰려다니고, 가로로 띄엄띄엄 난 줄무늬가 예쁜 은갈색 피라미는 먹이를 찾아 물살을 가르며 바삐 움직이고 있다.

영원히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 이곳에도 여느 생태계에서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결코 만만찮은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이 바야흐로 찾아왔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던 어느 날, 커다란 황새 한 마리가 개천 위를 휘 맴돌다가 하얀 날개죽지를 퍼덕이더니, 하늘을 가리고 풍파를 일으키며 개천에 내려앉았다.


뱁새들 다리 죄다 찢어 놓은 것으로 이미 소문이 자자한 그 긴 다리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듯 겅중겅중 걸음을 내디디며 검은 부리를 휘두를 때, 개천은 화들짝 놀라고 금세 아비규환으로 뒤덮였다.

황새가 도래한 이후로 개천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개천의 주인인 새끼들도 그 사이에 가재 붕어 개구리로 성장했지만 모두 힘을 합쳐 저항해도 황새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고 했던가? 평소에 자칭타칭 토룡(土龍)이라고 주장하던 지렁이가 청룡이 되어 리더십을 발휘하더니 마침내 황새를 몰아내고 개천은 평화를 되찾았다. 당연히 청룡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하늘로 날아 올라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과 평화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법. 개인과 가정사도 마찬가지지만 공동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겸손하고 서로 경계하며 잘 살피더라도 자연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사적인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 균열은 생긴다. 황새가 물러난 개천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 왔지만, 자신을 청룡이라고 사칭하는 이무기들이 가재 붕어 개구리를 ‘가붕개’라 부르며 멸시하고, 가르치고 다스리려 들었다.

개천 너머 산에도 여우가 호랑이 대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뭇동물들을 ‘개돼지’ 취급한다는 소식을 들은터라, 가붕개는 개돼지와 연합해 오는 4월 10일과 11월 5일에 전가의 보도로 간직해온 투표권을 엄정하게 행사해서 이무기와 여우를 퇴치하기로 결의했다.

2024년은 갑진년(甲辰年)으로 용의 해이다. 특히 올해는 10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청룡의 해라 한다. 용의 신성하고 고귀한 기운이 새해 소망을 갖고 출발하는 모든 이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정진하게 되기를 바란다.

<폴 김/전 재미부동산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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