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라고 하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떠올린다. 기원전 8세기경에 성장한 대표적 도시국가로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에 맞서 두 도시국가가 중심이 되어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문제는 페르시아의 두 번째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던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격퇴 전쟁을 더 지속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더 확장하려고 했던 아테네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면서부터였다.
결국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함께 반 페르시아 동맹을 탈퇴하였다. 아테네는 남은 도시국가들과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소아시아의 항구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아테네는 확보된 해상 무역로뿐만 아니라 동맹 도시들에서 반강제로 거두어 들인 공납을 기반으로 해상 제국으로 급성장하였다. 아테네의 급부상은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시켰고, 소수의 엘리트들이 다수의 노예를 다스리는 권위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던 스파르타에게 큰 위협이 되어 결국 스파르타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들과 적국들까지 동맹으로 묶고 스파르타가 추방한 노예 반란군들을 받아들여 스파르타 견제를 위한 전략지구에 배치를 하였다.
결국 두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들간 전쟁이 벌어졌고 30년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15년만에 평화조약은 깨졌다. 그리고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면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압도적 선진문명의 아테네는 27년 전쟁의 막을 내리고 스파르타에 패하여 무너지게 되고 정치, 경제,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문명의 새로운 힘이 없었던 스파르타 중심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변방의 마케도니아에 점령당한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의 승패는 적이었지만 거대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와의 경제 교류, 다른 도시들과의 우호관계, 그리고 해군력의 강화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적이었지만 강대국 페르시아와 대규모 무역과 경제 교류를 하였고 안하무인 아테네의 괴롭힘을 받은 도시국가들을 달래 주면서 성공적인 무역과 외교를 잘 했다.
반면 해양 국가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긴장 유지비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고 무역과 외교에서 다른 도시국가들에 대하여 힘에 의한 일방주의적 횡포를 부리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큰 피해를 입고 자멸했던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체였다.
아울러 내륙국가 스파르타는 육상 전투에서 아테네의 경보병에 참패한 충격을 겪으면서 본인들의 낙후되었던 계급 제도와 무기들을 개혁하고, 해군력을 증강시키며 외교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라이벌 국가였던 아테네의 전성기 국가 전략을 열심히 따라 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와 반대로, 해양 국가 아테네는 육상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제압한 이후 초강국의 지위를 갖게 되자 패권적 해양제국으로 돌변하여 본인들의 장점이었던 국제 무역과 외교에서 실패하였고, 또 내부적인 정쟁으로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여 스파르타의 해군을 괴멸시켰음에도 아테네의 함선을 수십 척 잃었다는 이유로 해군 제독을 정쟁의 재물로 사형시키는 우를 범하면서 아테네는 스스로 자멸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나라가 강성해지면 교만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과거 수평적 동맹국을 비롯한 약한 나라들에게 자국의 이념과 정치시스템과 불평등 무역을 강요하고 경쟁 국가나 적국을 힘으로 제압하려고 하면서 불필요한 곳에 힘을 낭비하고 경쟁국과 적국의 동맹을 더 강화시켜 주게 되면서 몰락했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혹시 수천 년 전 아테네와 같이 교만하여 미국만의 이익을 위하여 동맹국들에게, 불평등 외교와 무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중국과 러시아와의 대결에 희생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유권자들은 분명히 파악하고 개입을 해야 한다.
외교는 나와 상관없다며 방관하거나, 미국의 힘을 믿고 동맹국 위에 군림하고 경쟁국이나 적국에 대한 힘자랑 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착각한다면 언제 아테네의 꼴이 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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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