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無盡燈)] 폭풍의 계절
2023-01-26 (목)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겨울이 다 가기까지, 영화사엔 거센 비바람이 여러차례 지나간다. 오래 키운 나무가 허무하게 쓰러지기도 하고, 파라솔이 날아가기도 하고, 단정한 화단이 엉망진창이 되고... 아무리 미리 단속해도, 뒤처리 해야할 일은 해마다 생긴다. 이번 겨울엔 폭풍우가 더 심해서, 큰 나무가 담장과 워터 시스템 위를 치고 넘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폭풍우가 아니어도, 도량에 흩어진 부러진 브랜치들을 처리하는 건, 겨우내 해야하는 일인데, 거의 대부분이 유칼리툽스 가지들이다. 폭풍우에 다치는 건, 늘 유칼리툽스, 소나무 같은, 겨울에도 푸른 상록수들이다. 특히 잎이 풍성한 유칼라툽스는 한 해 평균 서너 그루는 넘어지고, 큰 가지 여러 개 부러져야 겨울이 끝난다. 거센 바람에 허리까지 휘어지며 몸살을 앓는 나무를 보고 있다보면, 왜 자연은 가을에 거의 모든 나무들의 잎을 낙엽지게 하는지, 저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들은 폭풍우에도 몸살을 그닥 많이 겪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잎이 많은 나무들은 큰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 사람도 거센 세파 쉽게 피하려면, 가볍게 살아야 한다고, 저절로 깨닫게 된다. 많이 갖고 있으면 편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언가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치러야 할 것도, 견뎌야 할 것도, 상처도 많다는 뜻이다. 그 그늘을 보지 못하고 밝은 부분만 볼 땐, 많이 가진 게 좋은 것처럼 보인다. 큰 부자들이 사는 걸 보면, 왜 저렇게 까지 힘겹게? 하는 부분이 많은데, 더 갖기위한 욕심 때문이라기 보다, 현재 가진 것을 지키는데 만도 그리 살아야 한다. 실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을 비롯해, 편리를 위한 대부분의 물건들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도 없었었다. 집안 수납장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 지금 모두 떠올릴 수 있는가. 거실 서랍속, 주방 서랍속, 책상 서랍 속, 벽장 속, 무엇이 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지금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가,지,고,있,다. 상상해 보라. 세상 모든 이들이 서랍장 깊숙이, 오래된 전자제품을 하나씩 넣어놓고 있다고. 그건 그냥 몇 해 동안 거기 그렇게 있다! 쓰임새 없이 간직해 둔 것과 쓰레기의 차이를 이 중은 모른다. 요즘 바깥 세상은 쉽게 가졌던 것도 갖기 어려운 시절 인연이 되었다. 사과 한 개를 두 개 값을 줘야 살 수 있게 되어, 살기 힘들어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과를 제철에만 먹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풍성히, 남아돌게, 버리도록, 당연한 듯이 그동안 살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대기업들부터 하나 둘 가지치기를 시작하고, 일이든 식품이든 개스든 뭐든 줄여야 하는 시점이 오고야 말았다. 내리막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별일 아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움직이므로, 오르막이 또 올 것이다. 다만, 그 때가 올 때까지, 기존에 유지했던 습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면,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껴야 한다. 하던 걸 갑자기 못하게 되면 힘들다 당연히. 그러나 무상을 아는 이라면, 못하게 됐다,가 아닌, 변했구나,로 바로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못하게 됐단 것은 상실이지만, 바꾼다,는 긍정적인 행을 수반하게 한다. 뭐든 지키는 일은 힘들다. 늙는 게 싫어 젊음을 지키려 애쓰는 것처럼, 변하지 않고 지키려는 건 고통이다. '거미가 자신이 지은 그물에 갇혀 지내 듯' 본인이 지키려는 것에 갇혀 지내게 된다. 물론 이것도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유지하고 버티며, 대신 폭풍우를 좀 더 거세게 치르면 된다. 인식의 변화는 삶의 많은 부분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지키고 무겁든, 버리고 가볍든, 소유의 문제에도 옳고 그름은 없다. 본인의 삶이고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은 폭풍의 계절, 좀 가벼워지는 게 옳은, 게 아니고, 좋다고 본다. 폭풍의 계절엔, 겨울나무처럼 비워내지 못하면, 폭풍우에 억지로 가지 쳐지고 상처나는 저 유칼리툽스처럼, 힘들게 치러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거센 세파, 아직 오지 않았다. 소유에 대하여 마음 가벼워졌으면 한다. 그리하여 상처 없이, 새해엔 모두가 무사하고 행복해지시길.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