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 데미안(Demian)에서 코스미안(Cosmian)으로

2022-11-10 (목)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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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말 세 마디가 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921-1880)가 남긴 말이다. “늘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날개가 달린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에 진리나 진실은 없다. 직감이 있을 뿐이다.“, ”현실이 이상에 부합되는 게 아니고 ‘현실(現實)이 이상(理想)을’ 확인시키는 거다. “

그 실증을 한두 개 들어본다.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태생의 스위스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그의 1919년작 ‘데미안(Demian)에서 말하듯이 “사람 누구에게나 오직 한 가지 천직과 사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단호하게 자신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살아버리는 것이다. 이 운명이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미안’에서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이 아들 친구 싱클레어에게 어느 한 별을 사랑했던 한 젊은이 이야기를 해준다. 이 젊은이는 하늘의 한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나 깨나 그는 그 별생각뿐이었다. 꿈까지 늘 꾸면서.


그렇지만 아무리 사모해도 인간이 하늘의 별을 자기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면 알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 그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이러한 운명이 가져오는 고뇌와 자학을 통해 그는 자신을 정화하고 순화해 승화시키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닷가 높은 절벽에 서서 별을 바라보며 그리움이 온몸에 사무치는 순간 그는 별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데’란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바닷가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몸을 던지는 순간 그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었었다면 그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그 별과 결합했을 것이다.
에바 부인은 또 다른 얘기를 해준다. 이번에도 짝사랑하는 젊은이 이야기다.

실연당한 이 젊은이에게는 푸른 하늘도 녹색의 숲도 보이지 않았다. 시냇물 소리도 들리지 않고 좋아하던 음악 소리조차 즐겁지가 않았다. 세상만사 숨 쉬고 사는 것이 다 무의미했다. 부유하고 행복했던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런데 타오르는 그의 정열의 불길이 그의 심신을 다 태우고 더욱더 강렬해지면서 이 젊은이를 숯덩이 자석처럼 만들었다. 그러자 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자력(磁力) 같은 매력에 끌려 그에게 다가왔다.

두 팔을 벌려 여인을 끌어안는 순간 잃어버린 모든 것을 그는 되찾게 되었다. 여인이 젊은이 품에 안기자 모든 것이 새롭고 찬란하게 되돌아 왔다. 한 여인을 얻은 것이 아니고 온 천하를 얻은 것이다. 하늘의 모든 별들이 그의 눈 속에서 빛나고 더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몸속으로부터 솟구쳐 샘솟았다. 사랑을 했고,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찾았다.

“사랑은 애원도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 열정과 정열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때 비로소 끌리는 동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넌 지금 내게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 매력이 나를 끌어당길 때, 나는 너의 여자가 될 것이다. 나 자신을 선물처럼 그냥 줄 수 없고, 네가 먼저 내 마음과 혼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를 타이른다. 이런 얘기들이 가공적 허구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갖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
새 생명을 출산하기 위한 해산의 진통, 이가 나고 날개가 돋기 위한 잇몸살과 날개 몸살 등등 말이다.

때로는 꿈꾸던 일이 뜻밖에 실현되는가 하면 이따금 꿈도 못 꾸던 ‘기적’ 같은 일까지 경험하게 된다. 군복무 시절 펜팔로 사귀던 아가씨와 제대 후 서울에서 잠시 사귀다 아가씨 어머님의 반대로 헤어진 후 1988년 25년이 지나 뉴욕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 드디어 맺어졌던 일이나, 또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1959년 만난 내 첫사랑 ‘코스모스 아기씨’와 이루지 못한 사랑 나의 소우주 ‘코스모스’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60년 만에 대우주 ‘코스모스’를 품게 된 것이야말로 더이상 바랄 수 없는 축복 중의 축복으로 감사할 뿐이다.

‘반쪽(Demian)’이 온전한 하나 ‘코스미안(Cosmian)’으로 진화(進化) 발전(發展)한 것이리라.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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