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 8월29일을 기억하자

2022-08-26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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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29일은 경술국치의 날(庚戌國恥日)이다. 일본이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을 공표한 날로 이날부터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36년을 고통 속에 살았다.

우리는 매년 8월15일이 되면 해방의 기쁨으로 만세 삼창을 하고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한인사회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그러나 해방 14일후인 8월29일은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수치’라면서 이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8월29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라를 넘겨주는 서류에 찍힌 도장 하나로 4,000년 강토와 500년 사직이 무너지고 2,000만 명 백성들이 남의 나라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좀 지난 10월7일 조선인 귀족 76명이 탄생했다.


윤택영, 이재완, 박영효(귀족회 회장) 등 6명이 후작, 이완용 등 3명이 백작, 송병준 등 22명이 자작, 김가진 등 45명이 남작 작위를 받았다. 최저 2만5,000원에서 최고 50만원의 은사금도 받았다. (1910년 조선인 고등과 연봉이 2,500원).

중세유럽의 작위는 왕 바로 밑인 공작을 시작으로 후작-백작-자작-남작으로 내려가는데 일본의 화족 제도는 유럽의 작위를 춘추시대 주의 작위에 비추어 한자로 역의한 것이다. 견장과 술, 휘장이 달린 서구식 제복을 입은 조선귀족의 사진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이들 조선의 귀족은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보장받았다. 귀족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화족 학교인 가큐슈인에 입학할 자격을 얻었다 직위는 자녀에게 물려줬다. 이들은 토지와 임야 등을 무상대부 조건으로 얻거나 그 돈으로 구입해 축재했다.

1905년 11월17일 대신 8명 중 5명(을사오적)이 찬성,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1907년에는 한일 정미7조약으로 입법권, 인사권, 행정권 등이 넘어갔다.

이때 조선을 일본에 판 7명의 대신이 바로 정미칠적이다. 1910년 경숙국치의 매국노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외부대신 박제순, 법무대신 조증응, 승녕부총관 조민희,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렇게 8명이다.

이들은 당대에 호의호식하며 살았다지만 3대를 못넘겨 후손들은 이름을 감추고 살거나 마약, 도박, 무모한 투자로 파산하고 타국으로 이민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이완용은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했는데 토지 보유 규모가 여의도 면적의 약 1.9배 정도였다. 증손자 이윤형은 1992년 소송을 통해 서대문구 일대 토지(싯가 30억원)을 되찾은 다음 팔아서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2002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차남 이항구의 아들 이병주는 1962년 일본으로 밀항후 귀화했다.
조증응은 이완용과 사돈지간으로 후손들이 숨긴 은닉재산 52억원이 올초 정부에 귀속되기도 했다. 반면, 박제순의 증손자 박승유는 일본군에서 탈영하여 광복군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사후 독립운동 공훈자로 선정된 바 있다.

8.15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립되었으나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인물이나 후손들이 이미 대법원장을 비롯 법조계 및 정부 요직에 있어 별 활동을 못했고 결국 해산되고만 아쉬움이 있다.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 8월29일 이 날을 공휴일로 하고 ‘대한민국이 반성하는 날, 자신을 돌아보는 날’로 삼는 것은 어떨까.

공공기관이 앞장서 깃봉에서 깃면의 세로길이만큼 내린 조기를 게양하는 방법도 있다. 서로 물고 뜯는 여야의 정쟁도 이날만은 멈추어야 한다. 무엇을 잘못하여 나라가 망했는가, 주권을 빼앗긴 후 백성들이 어찌 살아왔는가를 깊이 고민하는 날,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의 희생을 기리는 날, 8월29일은 이런 날이 되어야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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