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 산자와 죽은 자의 화합

2022-06-17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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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업스테이트 비컨에서 뉴욕시로 돌아오려고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로칼 도로 옆 새파란 잔디밭에 엄청난 숫자의 하얀 십자가가 줄지어 꽂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잔디밭 위에 ‘ Ukraine stand Upright ‘, 팻말도 보였다.

언덕 아래에는 300여개의 십자가가, 언덕 위에는 고풍스런 교회 건물 앞마당에 설치된 부스 30여개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동네인가? 우크라이나 기금모금 전시회를 하나?’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그곳으로 갔다. ‘Modern Makers Market’에서 아티스트들이 직접 만든 소품들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바자였다. 입장료는 기부금 3달러.


입구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무수한 십자가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폴 콜린스’, ‘어빙 호프만, ’존 피츠제럴드‘ 등 그 동네와 인근 지역 출신 군인들, 주로 2차 세계대전과 내전 그리고 미국이 참전한 여러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기억의 정원‘ (St Mary in the Highlands -Gardens of Remembrance) 이었다.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가보니 주얼리, 모자, 헝겊가방과 지갑, 스카프, 향수와 비누, 목공예와 유리공예품, 다기 등 독창적인 작품이 진열된 부스마다 사람들이 들어가서 구경하고 구매도 하고 있었다.

레모네이드와 프리첼 등 먹고 마실 것도 있고 부스 중심지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한 여성 뮤지션이 컨트리송을 노래하는데... 그냥 평화로웠다.

아무 욕심 없이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이들, 오래 전 누렇게 바랜 사진첩에서 보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의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가 있는 추모공간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샤핑도 하며 담담하게 오늘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숨진 군인을 영웅으로, 그들의 희생과 위로를 결코 잊지 않는, 살아있는 자들의 삶 속에 그들이 함께 있었다. 죽은 자들의 기억 또한 행복인 듯, 산자와 죽은 자들의 조화와 화합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그곳은 안락하고도 정겨웠다.

한편,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전쟁은 그칠 줄을 모르니 우크라이나인들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다. 도로가 파괴되고 집들이 파손되어 방공호나 다리 밑에서 지내는 이들의 피와 눈물은 어디서 보상을 받을 것인지. 전쟁은 국가나 민족의 운명은 물론 가족과 개인의 삶도 송두리째 앗아간다.

우리도 이런 전쟁을 치렀다. 오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72년이다. 그 기간 동안 폐허화 되었던 서울은 세계적 도시로 성장 했고 선진국 반열에 오를 정도로 국민의 생활상도 발전했다지만 우리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6.25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의 역사일 뿐 통일의 문으로는 한발자국도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무려 72년이나 지나고 있다.


한국 내 뿐만 아니라 뉴욕 한복판에서도 전쟁의 산 증인들은 6월이 되면 여전히 귓전에서 총소리를 듣고 전우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 왔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은 상흔을 치유해야 했다. 아직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평화 속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업스테이트 뉴욕 시골 마을의 십자가 추모공간을 보고 나오면서 전쟁은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두 나라가 모두 밀 수출을 못하니 세계의 밀 가격이 올랐다. 덩달아 식량난뿐 아니라 원유,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전세계가 재난에 빠졌다. 추운 겨울이 오고 내년에도 전쟁이 계속 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굶주릴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를 비난하는 것도 좋지만 하루빨리 두 나라가 합의점을 찾아 빠른 휴전협상과 전쟁 종식을 기대해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인간의 영원한 꿈 일런지도.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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