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생각 - 보이지 않는 손

2022-06-08 (수)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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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어머니 구순잔치 참석차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교롭게도 JFK 공항에 내린 폭설로 뉴욕행 항공편이 모두 결항되어버렸다. 간신히 미국행 항공기에 탑승할 수 있었으나 시카고 경유편이었다.

옆자리 창가 좌석에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승객이 편안한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생머리를 어깨 밑으로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시카고 착륙안내 기내방송이 나올 때 까지 열두 시간 넘게 밥 먹을 때와 화장실 다녀올 때를 빼고는 줄곧 책만 읽고 있었다. 항공기가 시카고에 가까워지자 나는 인천 공항에서 체크인 한 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승무원을 불러 물어보았다.


여승무원은 잘 모르니 수퍼바이저에게 알아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말없이 책만 읽고 있던 그녀가 ‘아저씨, 짐을 찾아 세관통관을 한 후 다시 부치셔야 해요’ 하고 내게 일러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학생인 듯 한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여학생은 시카고에서 내려 위스콘신 주 매디슨까지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고 말했다. 유학생이냐 물었더니 그녀는 위스콘신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대학은 고려대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고려대를 나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나도 고대출신인데 선후배가 이렇게 같은 비행기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여행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자’며 e-mail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녀도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내게 적어주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시카고 공항에 착륙하자 그녀는 선반에서 짐가방을 챙기더니 안녕히 가시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나와 헤어졌다.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그녀와 나눈 5분 남짓한 짧은 대화가 그녀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놓으리라고는 그때 아무도 생각치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가끔 이메일로 안부를 물었고 그녀는 또박 또박 회신을 해 주었다. 몇 번의 이메일 교신으로 그녀가 산을 좋아해서 혼자 2주일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등정했다는 것과 클래식과 팝 음악을 좋아하고 첼로를 연주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그녀처럼 산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니 둘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며 한번 서로 연락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사실 아들도 아팔래치안 트레일 2200마일을 5개월동안 걸어서 완주할 정도로 산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올스테이트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뉴저지 공연예술센터(NJPAC )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한 적도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고 두사람은 이메일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마침내 둘이서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019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Yoyoma)의 공연에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취미가 같고 마음이 통하는 두 젊은이는 만나자 마자 서로에게 이끌리었다. 둘은 겨울방학 때 뉴욕주에서 일주일간 동계 산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꽃들이 만개한 지난 5월말 두 젊은이는 양가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서울 신라호텔에서 상견례 겸 약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내년 5월 뉴욕에서 올릴 예정이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처럼 일어났으나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들을 맺어주셨음을 믿는다.

두사람이 겸손과 온유, 사랑의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미국과 한국사회에 기여하는 훌륭한 의사와 교육가로서 푸른 꿈을 한껏 펼쳐갈 것을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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