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경락의 법률칼럼 - ‘루니룰’

2022-04-15 (금)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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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방대한 스포츠 리그인 NFL(National Football League, 미식축구 리그)에는 특별히 ‘루니룰’ 이라는 게 있다. NFL에서 뛰는 대부분의 선수가 흑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이나 코치 같은 지도자 자리는 주로 백인들이 차지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계 인종의 감독 수를 늘리려고 만든 규정이다.

각 팀은 지도자 선발 시 의무적으로 소수계 후보와도 인터뷰를 거쳐야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벌금이나 드래프트 지명권 박탈 등의 페널티를 부과한다는 게 룰의 요지다.

루니룰은 ‘OJ 심슨 사건’에서 무죄 평결을 이끌어낸 전설적인 흑인 변호사 조니 코크란(Johnnie Cochran)과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싸이러스 메리(Cyrus Mehri)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2002년 ‘탬파베이 버커니어스’팀의 감독과 ‘미네소타 바이킹스’ 팀 감독의 해임이 그 발단이다.


흑인이었던 두 감독 다 좋은 성적을 내고도 뚜렷한 이유 없이 해임되자 평소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두 변호사가 해임 원인을 파헤치기로 의기투합했다. 우선 감독들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 정기 시즌이 끝난 후 각 조별 강자들만 출전하는 플레이오프 경기에 백인 감독들은 평균 3년에 한 번꼴인데 비해 흑인 감독들은 두 번 진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흑인 감독의 성적이 이처럼 월등하였음에도 잘렸다는 것은 인종문제 외에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두 변호사는 NFL 측에 “인종차별 개선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소송을 불사할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스타급 변호사들의 으름장에 바짝 긴장한 NFL은 ‘다양성 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초대 의장으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구단주 댄 루니(Dan Rooney)를 추대했다. NFL 구단주들이 장기간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대책이 바로 루니 의장의 이름을 따서 만든 루니룰이다.

체육계 통계에 따르면 1920년 NFL 초창기부터 2003년까지 80여 년간 소수계 감독은 총 7명밖에 배출되지 않았으나 루니룰 이후인 2003년부터 2020년까지는 총 111명의 감독 중 18.9%인 21명이 감독으로 진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최근 알려진 흑인 감독 브라이언 플로레스(Brian Flores)의 소송으로 미루어보면 루니룰의 실효성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플로레스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9년, 하위권 팀 ‘마이애미 돌핀스’의 지휘봉을 이어받아 단기간에 플레이오프 팀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인 2021년 갑자기 해고된다.

실직 후 절치부심 재기를 노리던 어느 날 ‘뉴욕 자이언츠’로부터 감독직 인터뷰 제안을 받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인터뷰 며칠 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감독 빌 벨리칙(Bill Belichick)으로부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된 것을 축하한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인터뷰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감독으로 확정된 것으로 축하 문자가 왔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다름 아니라 벨리칙이 동명이인의 감독 후보인 백인 ‘브라이언’ 다볼(Brian Daboll)에게 보낼 문자를 흑인 ‘브라이언’ 플로레스에게 그만 잘못 보냈던 것. 다볼은 이미 인터뷰를 마치고 최종 결과를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플로레스는 예정대로 인터뷰를 마쳤지만 뉴욕 자이언츠의 새로운 감독 자리는 아니나 다를까 백인 다볼에게 돌아갔다.

소수계 후보로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친 플로레스는 NFL 시스템 전반에 인종차별과 편견이 만연하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플로레스의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NFL은 지난 3월 28일 루니룰에 ‘무조건 소수계나 여성 공격 코치를 한 명 이상 선발’하도록 규정을 추가했다. 변화의 훈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플로레스의 소송 결과에 따라 NFL 경기장에 더 불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손경락/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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