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 아칸사 일기

2022-03-03 (목)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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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늙은 차를 타고 털털거리며 1,200마일을 달려 아칸사에 왔다. 펜실베니아의 광활한 설원을 지나고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쉐난도아 강을 건너고 버지나아주의 쉐난도아 마운틴과 테네시주의 스모키 마운틴을 넘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드디어 ‘미국의 호남평야’인 아칸사에 20시간만에 당도한 것이다.

아팔래치안 산맥의 영봉인 쉐난도아 마운틴은 차로 가로 지르는데만도 너댓 시간이 걸릴 정도로 웅장해서 고도가 바뀔 때마다 귀가 멍 막혔다 뻥 뚫리기를 수십번 반복해야 했다.

테네시주 멤피스를 지나 미국의 젖줄인 미시시피강을 건너면 아칸사주가 시작된다. 강을 건너자 마자 방금 전 지나온 멤피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이 안보이는 일망무제(一望無際), 대평원이 펼쳐지는 것이다. 온통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거대한 원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다. (한인들은 아칸사주를 ‘아칸소'라 발음한다.)


영화 ‘미나리’의 무대이기도 한 아칸사는 미국 최대의 쌀 생산지이다, 아칸사의 면적은 13만7,000 평방킬로미터로 미국에서 면적순위 29번째이나 남한과 비교하면 1.4배정도 더 넓다.

아칸사의 주도인 리틀록은 인구 50만의 중소도시로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구릉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언덕 길이 많고 집들은 언덕 위나 낮으막한 야산자락에 잡리잡고 있다. 특이한 것은 소나무가 많아 마치 한국에 온 것 같은 친근감이 든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출신지인 아칸사주는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공산침략으로부터 지켜낸 맥아더 장군의 고향이 리틀록이다. 또한 전 미국 태권도 총본부가 아칸사주에 있다.

한국의 태권도 사범들이 뉴욕이나 워싱턴 등 대도시를 마다하고 아칸사주에 본부를 둔 것은 한국과 비슷한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곳에서 태권도의 인기는 대단해서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말로 구령을 부치며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아칸사에는 약 560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한국마켓이 한 곳 있으며 한국식당도 한 곳 성업 중이었으나 주인 은퇴로 최근 문을 닫았다. 이곳의 기후는 한국의 제주도 날씨처럼 온화한 편이나 한겨울엔 영하로 내려가는 날도 가끔 있으며 여름은 덥고 습하다.

내가 있는 농장은 리틀록에서 15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소와 말과 나귀, 닭, 오리 등 가축을 키우며 블루베리, 토마토, 사과, 상추, 무 등 각종 야채와 과일도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하고 있다.

새벽에는 닭 울음 소리에 눈을 뜨고 밤에는 총총히 뜬 별을 보고 잠이 든다. 70평생 가파른 길을 허덕이며 달려온 나로서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여유로움이 아직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일은 일주일 전 새로 담근 막걸리를 걸러내서 마셔야겠다.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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