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 기미년 만세운동

2022-03-01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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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己未年)은 1919년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할 때이다. 조선의 전 국민이 비밀리에 3월 1일을 기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품에 숨기고 일제히 나섰다.

이날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는데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은 목숨을 내놓은 용감한 일이었다. 서명자 중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조선 인구의 1.5%로 겨우 26만명이었다.

사학자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그 당시 만세운동이 약 1,400군데에서 일어났는데 사건 내용이 사료에 남은 곳은 323지역이다. 그 중 78지역이 기독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으며, 천도교(失道敎) 중심이 66곳,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일으킨 지역이 42곳이었다. 아직 소수에 불과하였던 기독교도들 전원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거사였던 것이다.


그 당시 조선의 기독교는 교인들에게 구원 받고 천당 갈 것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울 것도 가르친 진보적인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보수화 된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와는 선교 개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이 선교 본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다. “만세 운동이 허리케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예배 성경공부 등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왜냐하면 목사 전도사 장로들의 대부분이 감옥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Chosun Mission Report 1919)

조선에 들어온 예수바람은 곧 새바람, 개화의 바람, 자유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오랜 쇄국주의를 타파하고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고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 국민에게 보급한 것이 기독교였다.

한글 보급에도 교회는 큰 역활을 하였다. 성경 찬송 사경회를 통하여 한글 보급을 열심히 하였다. 교회는 신식 교육기관을 도처에 세웠는데 1910년에는 이미 800개의 신교육 기관을 교회가 세웠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물리 화학 수학 창가 스포츠 정치 경제 법률과 독립국가를 지향한 군사 훈련까지 가르쳤다.

머리를 짧게 깎고 물 들인 옷을 입고 북과 나팔에 맞추어 체조를 하고 씩씩한 곡조의 노래를 불렀다. 함석헌 씨는 “양반의 학정 밑에서 마른 나무 같이 되었던 나라에 봄이 온 것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뜻으로 본 한국사)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전도 왕국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외형적으로 확장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사회와 나라의 인권 함양운동 평화 운동 경제의 공평한 분배 운동 등 기독교가 앞장 서서 할 일은 많다.

한국의 근대 정치사에서 군사정권이 장기화 될 때 한국 가톨릭교회가 군사정치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하여 많은 핍박을 받으며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오랜만에 교회가 보인 정의 운동으로 그 때 국민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보수집단이라는 교회에 대한 과거의 묵은 생각이 사회와 나라를 위한 집단이라는 인식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교회 인식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가 개인 구원을 위한 집단인가 사회 구원도 교회의 사명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는 계속되는 토의의 화두이다.

기미년 만세운동의 기적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각 사람이 모두 태극기를 휴대하였는데 일본 헌병의 감시를 뚫고 각자가 태극기 제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둘째 몇 마을이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는 것이 기적이다.

셋째 각 종교가 모두 협력한 것이 기적이다. 교리 싸움도 안하고 종교간의 협조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넷째 총칼 앞에서의 용기는 참으로 훌륭하였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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