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사이드 - 올림픽 오륜 데자뷰

2022-02-02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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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영웅으로 불리는 손기정은 1912년 일제시대에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선사했다. 마라토너로서는 최고의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유니폼에 그려진 국기는 일장기였다.

손기정이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가운데 남승용이 그보다 19초가 뒤진 성적으로 동메달을 땄다. 이런 결과는 세계 27개국에서 56명이 출전한 베를린 올림픽에서 거둔 쾌거였다. 하지만 유색 인종의 금메달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 스포츠계는 오직 순혈 아리아인들로만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비 아리안 선수들은 독일 스포츠계로부터 체계적으로 제명되었다. 아마추어 챔피언인 에리히 제리그, 당시 최고의 테니스 선수 다니엘 프렌, 세계적인 높이뛰기 선수 그레텔 베르그만 모두 제명되었다. 이처럼 독재는 무서운 것이다.


올해는 베를린 올림픽 86주년을 맞는 해이다. 독일 정권은 1936년 올림픽을 나치 선전을 위해 이용했다. 올림픽은 1차 세계대전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독일이 다시 국제사회에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독일은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단결된 나라의 모습을 선전했다. 이에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주최국의 인권 유린 문제를 이유로 올림픽 참가 거부를 지지했다.

당시 히틀러 독재정권은 독일 영토 확장 정책을 무시하는 척 하면서 평화를 사랑하고 관대한 독일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올림픽을 위해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이미지를 지웠다.

유대인 선수들과 관련된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독일 당국은 유대계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를 독일 대표 선수로 선발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여자 개인 펜싱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메달 단상에서 나치 정부에 경례했다고 한다. 하지만 올림픽 종료와 함께 독일 팽창주의 정책은 수위가 높아져 결국 2차 세계대전에 치닫게 되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도 한창이다. 2022 동계올림픽은 2022년 2월 4일에서 20일까지 이어질 예정인데, 미국은 중국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의 인권 탄압을 비난하며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영국과 캐나다도 정부 사절단을 보내지 않는 외교적 보이콧을 결정했다.

1936년에도 베를린 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 정부가 스포츠와 정치는 구분해야 한다며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례가 있다. 한국 외교부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보이콧과 엇박자를 내는 건 아닐까 우려된다.

독재정권이 개최한 올림픽 이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심심찮게 나오는 상황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건 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베를린 개최 이후 예정됐던 1940년 하계 올림픽이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올림픽 개최 3년 뒤인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올림픽 평화를 무참히 깨트렸다. 그 세계대전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고, 1940년 9월 21일부터 10월 6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던 차기 올림픽은 흔적도 없이 무산됐다. 그뿐 아니라 1944년 런던올림픽도 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됐다. 올림픽은 1948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개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과 평화는 한끝 차이인데, 한국이 중국과의 모호성을 계속 유지하기가 쉬울까. 미국이 외교적 보이콧을 공식화한 만큼, 문재인정권이 추진하는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한국전쟁 종전선언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나치 정권이 올림픽을 이용해 평화를 사랑하는 관대한 독일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지만 남은 것은 잿더미 폐해였다. 올림픽을 평화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는 중국 공산당 정부도 왠지 그와 같이 할 것 같은 예감이다. 오륜 데자뷰의 역사가 또 되풀이 되고 말까.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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