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종차별의 벽을 깬 개척자, 흑인 배우들의 위상 높여준 선구자

2022-01-28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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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문제 다룬 ‘흑과 백’과 ‘초대받지 않은 손님’서 주연

▶ ‘들의 백합’에서 흑인배우 사상 첫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

‘인종차별의 벽을 깬 개척자, 흑인 배우들의 위상 높여준 선구자

지난 6일 94세로 타계한 명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인종차별의 벽을 깬 개척자, 흑인 배우들의 위상 높여준 선구자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감독한 ‘흑과 백’의 한 장면.


‘인종차별의 벽을 깬 개척자, 흑인 배우들의 위상 높여준 선구자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감독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한 장면.



미국에서 인종차별 특히 흑백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민권법안이 통과 된지 반세기가 훨씬 넘는 요즘에 와서도 ‘흑인들의 목숨도 중요하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요즘 미국의 새로운(?) 병폐로 등장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흑인이라는 것이다. 흑인들이 자기들이 백인들로부터 당한 멸시와 수모를 엉뚱한데다 분풀이 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흑백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흥미진진하고 또 의미심장한 것이 모두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컸던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감독한 ‘흑과 백’(The Defiant Ones·1958)과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1967)이다.

두 영화에는 모두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주연한다.

흑인배우로서는 할리우드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포이티어가 지난 6일 바하마에서 94 세로 타계했다. 포이티어는 1963년작 흑백영화‘들의 백합’(Lilies of the Field·1963)에서 한 작은 마을의 수녀들을 위해 성당을 지어주는 떠돌이 노동자로 나와 노래까지 부르면서 뜨겁고 따스한 연기를 해 주연상을 탔다.

포이티어는 이렇게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의 벽을 깬 개척자로 할리우드에서의흑인 배우들의 위상을 높여준 선구자로 추앙받아왔다. 포이티어의 또 다른 중요한 대표적 영화가‘밤의 열기 속에서’(In the Heat of the Night·1967)이다.

포이티어는 여기서 인종차별이 심한 미 남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로 나와 자기의 뺨을 때린 마을의 백인유지의 귀싸대기를 패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했었다. 노만 주이슨이 감독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으며 영화에서 검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마을의 경찰서장으로 나온 로드 스타이거가 아카데미남우 주연상을 탔다.

‘흑과 백’은 포이티어와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흑백드라마로 쇠사슬에 함께 묶인 흑인과 백인 두 죄수의 탈출기이다. 미 남부의 두 죄수인 흑인 노아와 백인 존을 비롯해 죄수들을 수송하던 트럭이 전복하면서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함께 팔목이 묶여진 노아와 존은 도주한다. 둘은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면서도 자유를 향한 도주를 위해 이를 억제한다. 둘은 서로 육박전을 벌이고 욕설을 주고받다가도 도주에 성공하려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휴전에 들어가곤 한다.

노아와 존은 도중에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한 농가의 고독과 섹스에 굶주린 홀어머니로 인해 배신의 유혹을 받기도 하지만 둘은 서로를 묶은 쇠사슬을 끊은 후에도 함께 달아난다. 둘을 묶었던 쇠사슬이 노아와 존을 친구이자 동료로 만들어준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매우 감동적이다. 달리는 화물열차에 먼저 올라탄 노아가 안간힘을 쓰면서 뒤따라 달려오는 존을 향해 팔을 길게 내뻗지만 존이 이를 잡지 못하자 노아는 존을 버리지 못해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며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노아는 존을 품에 안고 흑인들의 노래를 부른다. 동료애에 의한 흑백통합의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형제애와 우정, 증오와 편견 그리고 인종 간 대결의식과 가혹한 미 형벌제도를 고찰한 훌륭한 작품으로 모질고 혹독하면서도 얄궂은 유머와 박력 있는 액션을 갖춘 영화다. 개봉 당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 남부에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대부분 다른 곳에서는 호평과 함께 흥행도 잘 됐다.

포이티어와 커티스의 연기가 강렬하고 둘의 화학작용도 아주 좋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예쁜 남자로만 취급 받던 커티스가 사납고 거친 연기를 맹렬히 해낸다. 포이티어 역시 훌륭한데 그는 노아 역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둘은 이 영화로 빅 스타가 되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과 촬영상(흑백)을 받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영화 제작 당시만 해도 미국 17개주에서 불법화했던 흑백 인종 간 결혼문제를 다룬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준수한 작품이다. 진보적인 미 상류층 부부로 평소 인종 간 평등의 이념을 지녔던 언론사 부장 맷(스펜서 트레이시)과 화랑을 경영하는 크리스티나(캐서린 헵번)는 자신들의 딸인 조앤나(캐서린 휴턴-헵번의 질녀)가 이혼남인 10년 연상의 흑인 의사 존(시드니 포이티어)과의 결혼을 선언하자 당황해 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특히 이 결혼에 크게 당황해 하는 사람이 맷. 흑백 간 평등의식을 딸에게 심어준 그가 막상 딸이 흑인과 결혼하게 되자 심한 갈등에 빠지나 뒤 늦게 사랑의 중요함을 깨닫고 딸과 존을 받아들인다. 이런 다른 인종간의 결혼문제는 미국의 한국인 사회와 함께 한국에서도 점차 많아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있어 결코 남의 일만 같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많은 한국인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이 타 인종 특히 피부색이 검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인종차별이란 이렇게 우리 모두의 안에 잠복해 있는 바이러스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것이 존이 자신에게 “너는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충고하는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다. 존은 “아버지는 스스로를 흑인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자신을 남자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과 함께 헵번이 여우주연상을 탔는데 헵번의 실제 연인이었던 유부남으로 병약한 몸으로 영화에 출연한 트레이시는 촬영이 끝난 지 2주 후 사망했다.

과연 흑백문제 나아가서 인종차별 문제에는 해답이 있는가. 이에 대해 한국인 부인을 둔 명 코미디언 풍자가로 배우이자 감독인 우디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도 미국에서 만연하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은 미국이 노예국가로 세워졌고 또 여러 세대에 걸쳐 인종편견으로 채워진 나라라는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이다. 수 백 년간을 인종문제에 대해 무감각해온 나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인종차별에 대한 폭력적 대응은 인종 간에 깊이 뿌리박힌 반감이 고르게 되어 사람들이 그 것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때까지 우리가 물어야할 대가이다. 우리가 여전히 타 인종을 증오한다면 법으로 인종 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의미 할 뿐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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