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영화 ‘재판’(The Trial) 의 울리세스 데 라 오르덴 감독
영화 ‘재판’(The Trial) 의 울리세스 데 라 오르덴 감독
‘재판’(The Trial)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민권을 말살하고 철권통치를 했던 군부 독재자들에 대한 재판을 다룬 기록영화다. 군부 독재자들은 이 기간 동안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 구금한 뒤 끔찍한 고문과 함께 살해했는데 당시 체포된 뒤 실종된 사람의 수만 해도 1만5천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은 1985년 4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됐는데 영화는 피고들인 9명의 군부 독재자들과 고문을 받은 피해자 그리고 실종된 피해자들의 가족들의 진술과 증언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피해자와 그들 가족의 진술에 따르면 군부 독재자들의 하수인들은 산 사람을 헬기에 태워 바다 위로 날아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등 듣기에 몸서리가 쳐지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들의 진술을 듣노라면 강한 충격과 함께 감정적으로도 치열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를 감독한 울리세스 데 라 오르덴(53)을 영상 인터뷰 했다. 울리세스는 수년간에 걸쳐 재판 과정을 찍은 530시간 분량의 필름을 편집해 3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는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서 선을 보였다. 한편 이 재판을 다룬 극영화 ‘아르헨티나, 1985’(Argentina, 1985)는 올 해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탔다. 영화 소개 차 파리에 묵고 있던 울리세스는 두 손 제스처를 써가며 마치 강의를 하듯 진지하고 또 숙연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재판의 내용을 기록영화로 만드는 과정이 어땠는가.
“재판을 찍은 필름은 과거 40년간 창고에 묵혀 있었다. 우린 530시간에 걸친 필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강렬하고 복잡한 얘기를 종합적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검찰 측이나 또 다른 관계자들의 견해를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졌는데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책임과 재계와 육해공군 고위 관계자들의 책임 등이 그런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당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점이라도 있었는지.
“재판 과정을 찍은 필름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런데 사실은 군부 독재정권의 만행의 대부분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배운 것은 이 재판이 아르헨티나 역사의 시금석이 되리라는 점이었다. 과거 20세기에 아르헨티나는 독재정권의 연속에 시달려야 했다. 이 재판은 민주주의가 회복 된지 불과 2년 후에 열렸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는 독재정권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젠 그 어느 시민들도 군사적 조치가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하질 않는다. 이젠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위험하질 않다. 난 이런 사실을 말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신의 기록영화들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어떻게 작품을 선정하는가.
“내가 만든 기록영화들은 다 결혼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것들이다. 영화의 착상에서부터 상영될 때까지 장기간 지속되는 타협의 결과이다. 특히 기록영화는 배급이 힘들어 이 같은 타협이 절대로 필요하다. 내가 기록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나는 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는 정치와 환경과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 내 컴퓨터에는 여러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있는데 갑자기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그 것을 작품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같은 내용을 다룬 극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내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관련 자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고 우리 제작진이 530시간에 걸친 필름을 보고 제작을 시작한 것이 2019년이었다. 그 때 ‘아르헨티나, 1985’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 난 이 재판 얘기가 우리가 먼저 소유한 주제였기 때문에 그 소식이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곧 이어 그 얘기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전 국민 그리고 나아가서 전 세계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같은 얘기에 관한 두 개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 재판에 관한 영화는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매번 만들어질 때마다 같지가 않기 때문에 그 얘기는 하면 할수록 더 값어치가 있고 또 강해진다고 믿는다.”
-아르헨티나에서 ‘아르헨티나, 1985’는 호평과 함께 흥행도 잘 된 반면 당신의 영화는 아직도 배급사를 못 찾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기록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는 항상 매우 힘들다. 대부분의 스크린을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과 극소수의 아르헨티나 산 극영화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영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배급업자들은 늘 흥행 성공이 확실한 것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당신의 영화와 ‘아르헨티나, 1985’는 모두 증인으로 출두한 아드리아나 칼보 데 라보르데의 진술을 삭감 없이 전부 담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증언이 가장 강력한 진술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체포됐다가 살아남은 최초의 피해자로서 법정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실려 가던 차 안에서 출산을 했다는 얘기는 가장 참혹한 상황 중의 하나로 가공스러울 뿐이다.”
-아르헨티나는 부패 특히 정치인들의 부패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도 있는지.
“나는 감정적으로 날 움직이는 주제를 영화로 만든다. 아르헨티나가 몹시 부패한 나라고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난 지난 20년간 기록영화 총 10편을 만들면서 정부기관인 전국 촬영협회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았는데 협회는 단 한 번도 내게 어떤 불법적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에 부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면서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정부 기관들도 많다. 그리고 언론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정치적 측면의 부패도 그 진실한 상황이 100% 밝혀진 것도 아니다. 이런 처지에 어느 한 쪽을 싸잡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젠가 정부 기관의 부패에 관한 사실이 명확히 밝혀질 때면 그 것에 관한 영화를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생각이 없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인플레가 100%에 달하고 국민의 40% 이상이 빈곤층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1970년에 나라의 인구는 2천500만 명이었고 그 중 빈곤층은 6%였다. 그런데 현재 인구가 5천만 명인 우리나라의 빈곤층이 거의 50%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식량도 전체 인구가 먹고도 남을 양을 생산하는데도 기아현상이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경제 문제가 풀기 난감하니 모든 대학의 경제과를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겠다. 난 그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 영화인이 되기로 결심했는지.
“즉흥적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15세인가 16세 때 여름이면 친구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아르헨티나 남부의 아름다운 숲과 산을 돌아다녔다. 그 때 파타고니아를 등반하면서 그 전해의 산불로 인해 사방이 황폐화한 지역을 목격했다. 그런 곳을 지나가면서 난 처음으로 그 불 탄 곳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 뒤 몇 년 후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영화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2년으로 그 때만해도 아르헨티나는 1년에 고작 6편의 영화를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빨리 공부를 마치고 전공이던 카메라 보조원이던 무엇이던지 영화계의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어 그로부터 10년 후 난 내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내 첫 영화 ‘업스트림’(Upstream)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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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흥진 골든 글로브협회(GGA)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