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같은 부처님 가르침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겠다. 그저 안색이나 형색만 보고 사람의 됨됨이를 속단해서는 안된다고 평이하게 말하면 그만이다. 표지만 보고 책을 평가하지 말라는 서양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금방, 보통사람이라 해도 그리 오래지 않아 알게 되는, 알 수밖에 없는 평범한 진리다.
행불선원장 월호 스님(사진).
불교방송 BBS의 인기 프로그램 ‘행불아카데미’ 진행자로 유명한 월호 스님이 여러 방송에 출연한 장면들을 보노라면 첫머리 경구를 깜박 잊기 쉽다. 원만한 상호, 그칠 틈이 없는 웃음, 유쾌하고 활력있는 언변 등 덕분에 스님은 행복을 타고났나보다 생각이 들 수밖에. 10여년 전에 스님이 연 행불선원 서울송파도량과 이천도량에서도 언제나 웃음꽃 만발이다. 스님도 웃고 제자된 법우들도 웃는다. 재작년 어느 종편에 초대돼 인생을 잘 사는 법을 묻는 질문에 스님은 대번에 “웃읍시다. 웃을 일이 생깁니다”라고 답했다.
행불선원 법우들의 인사법도 색다르다. “성불하세요” 대신 “행불하세요”다. 우리 모두 이미 부처인 만큼 새삼스레 부처가 되자고(성불) 할 게 아니라 부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는(행불) 뜻에서다. 그래서 행볼선원이고 그래서 행불아카데미다.
그런데 틀렸다. 스님은 행복을 타고난 게 아니다, 적어도 속진에 물든 눈으로 보면. 알고보니 스님은 웃기는커녕 평생 울어도 모자랄 것 같은 사연을 가졌다. 선 전공으로 동국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제방선원에서 정진하고 쌍계총림 방장 고산 큰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받고 동국대, 해인사 승가대학,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등 화려한 그의 스펙과 늘 행복한 그의 모습에 가려졌을 뿐이다.
간추리면 이렇다. 명문대 공대 출신으로 유명 대기업에 취직해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돌연 진로를 바꿔 출가한 것은 성인이 된 두 살 터울 남매 동생을 차례로 잃은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졸지에 혼자가 된 그는 이제 내 차례인가 하는 공포어린 번뇌에 시달렸고, 번뇌는 의문을 낳고 의문은 다시 회의를 낳고... 결국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낸다. 부처님 공부에 매달린다. 끝내 행불의 길이 열린다. 기어이 행불의 길을 연다.
두 동생을 잃은 것은 방편일 뿐 그의 행불 수행자의 길은 어쩌면 진작부터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월호 스님이 불심깊은 어머니로부터 수없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 누워계시는데 부처님과 시자 두분이 집에 오셨답니다. 시자 스님이 저를 가리키면서 ‘부처님, 여기 부처님 제자가 태어났습니다’ 이랬더니 부처님께서 쳐다보시고...”
성불은 이미 됐으니 행불을 하자고 외쳐온 월호 스님이 코로나나 불황이다 웃음을 잃은 현대인을 위해 마음공부 새책을 내놨다. 대표적 대승경전이자 불이(不二)사상의 정수가 담긴 <유마경>을 이 시대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낸 <월호 스님의 유마경 강설>이다. 두어달 전 조계종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에서 월호 스님은 “요즈음이야말로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말이 실감나는 시기입니다. 인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인류의 대다수가 코로나19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나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너와 나,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유마경의 지혜를 잘 전해서 모든 생명이 해탈의 길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알라딘이나 예스24 등 인터넷 서점에 들러 이 책의 극히 일부를 한번만 눈동냥해도 이 책의 전부를 여러번 정독하고픈 갈애(?)가 샘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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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